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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의원의 딜레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실험정신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다. 대선이 있는 올해 여러가지 정치실험이 있었고 현재 진행 중인 것도 있다. 가장 먼저 실험의 대열에 뛰어든 사람은 박근혜(朴槿惠)의원이다.

朴의원은 대선후보·당대표 분리와 집단지도체제 도입 등을 요구하다 수용되지 않자 지난 2월 말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그는 결국 연말 대선엔 출마하지 못하게 됐지만 그의 탈당이 여야를 지배하고 있던 '대세론' 붕괴에 촉매로 작용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결국 朴의원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선 이인제 대세론이 무너졌다.

지난 3월 초 민주당 후보경선이 시작되면서 노무현(盧武鉉)의 실험이 시작됐다. 그는 정치사상 초유의 '국민경선'을 통해 후보가 됐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정치인 팬클럽이라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와 '노풍(노무현 바람)'이 등장했다. 盧후보는 그러나 후보로 확정된 직후 김영삼(YS)전 대통령을 찾아가면서 엄청난 역풍을 맞게 된다. YS가 준 시계를 차고 YS에게 지방선거에서의 부산시장 후보를 낙점해 달라고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지지자들이 등돌리기 시작했다. 기성 정치인과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盧후보는 9월 들어서부터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외면한 지지자들이 이런 盧후보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한다.

민주노동당 권영길(權永吉)후보의 정치실험은 한국 정치사에서는 최초의 것이다. 그가 이번 대선에서 당선되리라고는 본인도, 민노당도, 지지자들도 거의 기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득표는 상당히 의미있다. 2004년엔 원내 교두보 확보, 2008년엔 원내교섭단체 확보 등 그들에겐 꿈이 있다. 그는 "역사상 진보정당은 결코 우연히 집권한 적이 없다"며 '진보의 벽돌'을 한장씩 쌓겠다고 말한다.

지금 정치권의 관심은 정몽준(鄭夢準)의원의 실험이다. 월드컵 열기를 자신에 대한 지지로 이어가면서 그는 중앙당 폐지,원내정당 구성 등 새정치를 내걸었다. 그는 8월 중순 이한동-김중권-이인제-조부영씨 등의 제3신당 창당 제의에 "'4자연대'와 같은 제3신당 논의에 참여하는 것은 국민의 기대와는 멀다"며 거부했다. 鄭의원은 자신에게 오겠다는 의원들을 향해 "배신한 사람은 안된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던 그가 자민련-이한동-민주당 후단협(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과 함께 '4자연대 신당'창당에 합의했다. 그랬다가 지난 21일 자민련 의원들이 4자신당 참여를 유보하고, 후단협 일부 의원들이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22일엔 독자신당 창당계획을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런 모습은 鄭의원의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현재의 지지도가 거품이 될까 두렵다. 박근혜 의원이 그런 경우다. 원칙을 잃어버리면 지지자가 떠난다. 盧후보가 YS를 찾았다가 곤두박질 친 것이 사례다.

새정치의 원칙을 지키자니 세(勢)가 없고, 세를 확보하자니 원칙이 무너진다. JP를 거부하면 원내교섭단체 만들기도 벅차고, 함께 하자니 비판이 두렵다. 민주당 동교동계 의원들을 내치자니 호남표가 아쉽고, 같이 하자니 신당에 DJ색깔이 덧칠될까 걱정이다. 그래서 후단협과 자민련이 鄭의원 신당에 헤쳐모여식으로 참여해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정치에서는 어림없는 얘기다.

鄭의원은 최근 기자들에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初心)"이라고 한 바 있다. 꿈을 버릴 수도,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심판은 국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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