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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오른 64세 산처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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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산은 인간을 유혹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발길을 거부한다.

히말라야-. 그곳은 분명 인간세계와 동떨어진 '신비의 왕국'이다.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 순식간에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눈사태, 얇게 덮인 눈 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 도처에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널려 있다. 그러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인간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마약과도 같다. 그러기에 생명을 담보하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도전하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산악인이 히말라야로 떠난다. 보이테크 쿠르티카(폴란드 산악인)는 '등반은 인내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며 정상을 밟는다. 바로 여기에 설산(雪山)의 매력과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다.

'산과 결혼'한 와타나베 다마에(渡邊玉枝·64).

지난 5월 16일 5척 단신(1m59㎝)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일본의 여성 산악인 와타나베를 통해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새삼 느낀다. 그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처음으로 히말라야에 발을 디뎠고 젊은 사람도 하나를 오르기가 힘들다는 히말라야 8천m 고봉을 벌써 네개나 훌쩍 뛰어넘었다.

와타나베가 지난 15일 한국여성산악회 초청으로 한국에 와 강연했다. 60대 중반이면 손자의 재롱을 보면서 인생을 마무리할 나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산에서 만난 그는 군살 하나 없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는 백운산장으로 이어지는 바위길을 흐트러짐 없이 사뿐사뿐 올랐다. 이웃집 할머니처럼 인자한 모습에서 에베레스트의 험한 사우스콜을 넘어 정상을 밟은 사람임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다.

곱게 물든 북한산의 가을은 여인의 하얀 속살처럼 봉긋 솟은 인수봉을 휘감으며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와타나베는 백운산장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오르면서 '아름답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조그마한 바위에 올라 안개에 휩싸인 도봉산을 바라보며 대도시 근교에 이런 산이 있다는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일반인들은 산사람을 만날 때마다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어본다. 잠시 숨을 고르며 똑같은 질문을 했다.

"자연에는 사계절이 있지요. 등산을 하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산을 올랐을 때 느끼는 환희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산은 인간에게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부딪쳐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줍니다."

와타나베는 "산에서 게으름을 피우면 실패하게 마련이지요. 산은 인간이 노력한 만큼 받아줍니다. 산의 이런 순수함이 오늘의 내자신을 있게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938년 후지산이 보이는 야마나시(山梨)현 가와구치(河口)호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대도시인 요코하마(橫濱)의 작은 회사에 입사했다. 2년여 뒤 가나가와(神奈川)현립고등학교로 옮겨 사무장으로 20여년 근무하고 10여년 전 정년퇴직했다.

와타나베는 패전의 비참함 속에서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꿈이 현실로 이뤄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면서 평범하게 살아왔지요. 젊었을 때는 생활이 어려워 미래에 대한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양재기술을 배우는 게 취미생활의 전부였지요."

그러다 인생이 바뀌는 계기를 만난다. 그녀는 26세 때 직장산악회를 따라 '암벽 메카'로 통하는 군마(群馬)현 다니가와 다케(谷川岳)에 올랐다. 아름다운 설산의 풍경에 흠뻑 빠져든 그녀는 첫 산행의 추억을 마음 속에 아로새겼다.

왕성한 산악활동으로 히말라야를 동경(憧憬)하게 된 와타나베는 40대에 매킨리와 알프스 몽블랑을 올랐다. 이후 그녀는 50세 이상의 회원들로 구성된 실버 터틀클럽(Silver Turtle Club)에 가입해 본격적인 해외 원정길에 나섰다. 그리고 53세 때 히말라야의 초오유(네팔·8천2백1m)를 올랐다.

와타나베는 당시 초오유 정상에 올라 에베레스트(8천8백50m)를 보고 '저렇게 큰 산도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올 5월 '세계의 지붕'을 밟은 것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그는 모든 산이 발 아래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세계의 꼭대기에 올랐음을 실감했다. 멀리 있는 초오유봉을 보고 11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몸을 떨었다.

와타나베는 2000년 폴란드 산악인이 세운 여성 에베레스트 등정 최고령 기록(50세)도 갈아치웠다. 그러나 본인은 산을 내려온 뒤 언론 보도를 보고 기록을 경신한 걸 알았다고 했다. 그녀는 "등반은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경쟁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 순간 등정은 실패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평소 그는 어떻게 체력을 관리하고 있을까.

그는 체력을 감안하지 않고 운동을 하면 몸에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별도 훈련을 하기보다는 매일 많이 걷고 한달에 두번 정도 당일 산행을 다녀온다고 말했다. 식사는 육류보다 야채와 생선을 주로 먹는다고 했다. 지난달 말에는 일본 여성인 우치다 도시코(內田敏子)가 71세로 히말라야 초오유를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노년층 여성들의 왕성한 활동에 대해 와타나베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절제된 생활을 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는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등반 스타일은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다. 지난 5월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그녀를 만났던 산악인 엄홍길(43·파고다외국어학원)씨는 "처음 베이스캠프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매우 다부져 보였다. 낡은 장비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전문 산악인으로 생각했다. 걸음걸이는 신중했고 체력 안배도 잘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속도를 내고는 몇 발자국 못가 금세 '헉-헉'대는데 그녀는 지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아 놀랐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세월의 흐름은 못 속이는 법. 그는 4천m 정도 오를 경우 구토·두통 등 고소증세를 보이지는 않으나 하품이 나오고 체력이 다소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적은 인원으로 해외원정을 떠난다. 대원이 많다 보면 의견이 엇갈려 신경쓰이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란다. 1998년 가셔브럼2봉 원정에 나섰을 때였다. 16명의 대원과 5명의 방송요원이 참가했는데 개성이 강하다 보니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그녀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귀국해 보니 체중이 8㎏이나 줄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비디오 카메라맨과 둘이 에베레스트 원정을 떠났다.

와타나베는 그동안 저축했던 돈과 퇴직금으로 해외원정을 꾸려왔다. 이번 에베레스트 원정에서는 비싼 입산료(한팀 5인 기준 5만달러) 때문에 상업등반대에 참가해 1인당 약 2만5천달러를 썼다고 한다. 이제 그녀의 자금은 거의 바닥이 났다. 그래서 내년까지는 원정계획이 없다.

그녀가 가장 감명받은 산악서적은 『8천m의 위와 아래』다. 국내에도 소개된 이 책은 헤르만 불(독일)이 히말라야 낭가파르밧(파키스탄·8천1백25m)을 초등한 경험을 토대로 썼다. 53년 낭가파르밧을 오른 헤르만 불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주위는 작은 설면이고 한두걸음이면 사방이 낭떠러지다. 등정했다는 기쁨보다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아도 되고 뒤를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일 뿐이다"고 표현했다. 히말라야 정상에 선 와타나베도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그녀가 존경하는 산악인은 자신과 동갑으로 96년 마나슬루에서 실종된 고니시 마사쓰구(小西政繼) 및 다베이 준코(田部井淳子·63). 와타나베는 다베이와 함께 매년 한차례씩 해외로 등반을 떠난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산을 찾겠지만 70세가 넘으면 위험한 산행은 그만두고 산을 즐길 계획이라고 와타나베는 말했다.

"아직도 동양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보다 떨어지는 게 사실이죠. 어느 사회에서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지난날은 다시 오지 않으며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모든 여성이 나이를 의식하지 말고 그때 그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여성의 지위가 회복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한국여성산악회 초청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그마한 활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산보다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해 결혼을 안했다는 와타나베의 마음은 오늘도 히말라야의 푸른 창공을 날고 있는 듯하다.

김세준 기자 sj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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