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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6) 풀려난 박정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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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김안일 과장은 박정희 소령의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 동기생으로, 그의 처지를 내게 설명해 면담을 주선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줄곧 숙군 작업의 전 과정에 간여한 핵심 수사관이었다. 김창룡 대위는 일본 헌병 군속(軍屬), 지금으로 말하자면 군무원(軍務員)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생 출신이었다. 김 대위는 뒤에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지독한 수사관으로 악명을 떨치지만, 어쨌든 베테랑 수사관으로서 숙군 작업의 전 과정에 걸쳐 지대한 공을 쌓은 인물이었다.

두 사람을 내 사무실로 불러들인 것은 박정희 소령을 풀어주기 직전에 다시 한번 이들의 다짐을 받아두기 위해서였다. 수사관들은 자신이 진행한 수사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곧잘 말을 바꾸기도 하는 버릇이 있다. 박 소령을 곧 풀어주기 위해서는 이들로부터 ‘모든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는 확인을 받는 게 필요했다.

“두 사람, 이리 와서 서명을 하라”고 내가 지시했다. 이들은 ‘무슨 내용의 문서냐’는 식의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박 소령이 곧 풀려나게 됐다. 이 사람이 남로당에는 가입했지만 실제 활동한 내용이 없어 형 집행정지를 받는다는 점을 보증한다는 문서다. 나와 셋이서 함께 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1951년 2월 한국인 노무자들이 지게에 C레이션을 비롯한 식량과 탄약 등을 지고 전투지역인 고지로 운반하고 있다. 주변에 미군 호위병이 보인다. 미군 전투식량인 C레이션 한 박스는 당시 암시장에서 국군 초급 장교의 월급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등의 자료를 모아 출간한 『한국전쟁·Ⅱ』(박도 엮음, 눈빛 출판사)에 실린 사진이다.

김안일 과장과 김창룡 대위 모두 그에 따랐다. 나도 그 문서에 서명을 마쳤다. 위로부터 얻은 재가와 수사를 지휘하고 진행한 우리 세 사람이 모두 그 내용을 확인했다. 나는 이 작업을 마친 뒤 두 사람에게 “이제 박 소령을 풀어줘도 좋다”고 말했다.

박 소령으로서야 사형 판결을 받은 뒤에 집행정지를 받은 사건이 일생일대의 큰 고비였겠지만, 숙군 작업과 함께 북한의 동향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나로서는 금세 잊히는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북한이 벌써 옹진과 개성의 송악에서 국지적인 무력 도발을 시작했고, 강원도 양양의 북쪽 기사문리 등에서도 군사 충돌을 감행했다. 그런 북한의 동향이 당시로서는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나는 박 소령을 풀어주라는 지시를 한 뒤 그를 잊고 있었다.

그 즈음의 어느 날 누군가 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내 말에 이어 문이 열리더니 누구인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는 않는 한 인물이 군복 차림의 박 소령을 데리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박 소령의 얼굴은 여전히 수척했다. 풀려나는 것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일이 잘 됐습니다. 이제 나가도 좋습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과묵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듯한 인상의 박 소령이 고개를 꾸벅거리면서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표현이었는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박 소령에게 응접세트를 가리키며 “잠시 앉으라”고 권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 한 쪽에 앉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게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 소령의 얼굴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와 나는 잠시 무슨 말인가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내용은 역시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일상생활에 관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군복을 벗었다. 어떻게 생활을 해 갈 것인지 궁금했고, 나는 그에게 그런 것들을 물어봤던 모양이다. 나는 그저 인생 길의 심한 고비에서 비틀거리다가 돌아온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박 소령에게 “잠시 앉아 있으라”고 말한 뒤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 유양수 전투정보과장의 사무실로 갔다. 그는 김점곤 전투정보과장이 광주 5사단의 부연대장으로 발령이 나자 그 후임으로 갓 부임한 상태였다.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었다.

나는 유양수 과장에게 “박정희 소령이 갈 곳이 없다. 이제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이 된 마당에 갈 곳도 없다고 하니 자네가 데리고 있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양수 과장은 난색을 표시했다. “군무원으로 데리고 있으라는 말씀이지만, 예산이 부족해 그 사람에게 줄 봉급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점은 걱정하지 마라. 정보국장 기밀비에서 마련해 줄 테니까 박 소령을 군무원으로 일하게 하라”고 말했다. 유양수 과장은 그때야 할 수 없다는 듯이 내 지시를 받아들였다.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박 소령, 나와 함께 좀 가자”고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랐다. 그를 데리고 다시 유양수 과장 방에 들어선 나는 “앞으로 유양수 과장 밑에서 문관 자격으로 일을 하라”고 말했다.

당시 내게는 별도의 ‘예산’이 있었다. 나와 함께 근무하는 미군 고문관 리드 대위가 건네준 선물이었다. C레이션은 미군의 주요 전투 식량이었지만 평시에는 현금 대용으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정부에서 주는 예산이 마땅치 않은 당시 정보국 형편을 감안해 미군들이 지원하는 물품이었다. 리드 대위는 미 군사고문단의 허락을 받아 이 C레이션 두 창고 분량을 내가 쓰도록 했다. 나는 이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38선 이북의 정보를 탐지하기 위해 파견하는 정보원이나 예상치 못한 경비가 필요한 부서와 부대원들에게 골고루 지급했다. 군복을 벗고 문관으로 일하게 된 박 소령도 이 C레이션의 혜택을 보게 된 셈이다.

박 소령은 그렇게 풀려났고, 다시 정보국에서 문관 자격으로 생업을 이어가게 됐다. 그는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참 무덤덤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업무로 빠져들었다. 숙군 작업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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