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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0>제103화인생은나그네길:44. 라디오 DJ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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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얼마 전 서울 성동복지관에 '노래봉사'를 하러갔다. 그곳에서 일하는 신부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1980년대에 함께 라디오 방송 진행을 했던 한인경씨를 만났다.

한씨는 현재 평화방송(라디오)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하세요'라는 노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그녀도 나와 비슷한 부탁을 받고 온 것이었다. 한씨는 이필원과 함께 70년대 듀엣 뚜아에무아의 멤버로 활동한 가수다. 박인희 다음으로 이씨와 짝을 이뤄 활동했다.

나는 81∼82년 만 2년간 한씨와 함께 KBS 사회교육방송의 '공산권 동포에게'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저녁 9시30분부터 두시간 동안 방송됐는데, 청취 대상은 중국의 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랴오닝(遼寧)성 등 동북 3성과 옛 소련의 연해주와 사할린, 타슈켄트·알마티 등 중앙아시아 등지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었다.

냉전이 사라지고 방송의 권역도 엄청나게 확장된 지금에서 보면 별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당시 나는 상당히 긴장된 상태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철의 장막 혹은 죽의 장막 너머로 내 목소리가 나간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냉전 이데올로기는 이 정도로 개인의 마음까지 지배했다.

그렇지만 프로그램 내용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중국이나 소련에서 녹음해 온 테이프를 통해 '육성 사연'이 나가면, 이를 듣고 옛날에 헤어진 가족이라며 연락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을 계기로 서로 생사를 확인한 '결연가족'(당시 우리들이 부르는 용어였다)의 아픈 사연이 끊임없이 소개됐다. 동포들은 요긴하게 쓰일 물건들을 고국의 가족들에게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책이나 영어사전이 인기 품목이었다.

동포들은 해방 이전 우리 가요를 즐겨 신청해 들었다.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은 거의 매일 방송되다시피 할 정도로 인기였다. 최신 가요로는 당시 정상이었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단연 돋보였다. 내 노래 '하숙생'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런 인기곡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그네 이미지가 떠올랐다. 결국 동포들은 자신들이 역경을 딛고 살아온 인생을 이런 노래를 통해 위로 받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과연 이들이 이 방송을 얼마나 즐겨 들으며 유용하게 느끼는지를 가늠할 길이 없었다. 영향력이 궁금했던 것이다.

거의 10년 뒤 내가 그걸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다. 91년 이 방송국 주관으로 소련 동포 위문 공연을 떠나게 된 것이다. 나와 김용만·김부자·방미·박남정 등이 공연단을 이뤄 타슈켄트와 알마티 등을 돌며 고려인들을 위문했다. 초여름 무렵으로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려 숙소로 이동하는데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받았다. 뭔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길 옆에 늘어선 현대와 대우 등 우리나라 기업의 홍보 간판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무튼 당시 고려인들을 통해 들은 사회교육방송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이 방송을 통해 고국의 변모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덕분에 고국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은 높았고,그게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활력소 구실을 했다.

이게 아니더라도 고려인들은 특유의 근면성으로 어느 다른 민족보다도 사는 형편이 나아 뿌듯했다. 우리의 공연장이기도 했던 알마티의 고려극장을 둘러 보고서는 고려인들의 문화적 자긍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며 민족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는 그 강한 생명력은 한민족 특유의 유전자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중국 조선족의 형편도 소련과 비슷했다고 들었다. 지금이야 왕래가 빈번해 가까운 이웃처럼 오가고 있지만, 어쨌든 그 개방의 물꼬를 트는 데 사회교육방송이 한몫을 하지 않았나 한다. 개국 초창기 진행자로서의 사명감에서 하는 이야기다.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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