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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8>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42.1990년 천주교 영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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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얻어 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1990년 겨울 나는 서울 동부이촌동 한강성당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디모테오다.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에 회의적이었던 나를 앞의 그 문구 하나가 하느님께 인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는 아내 김희련(김비비안나)을 만나 연애 하던 시절이다. 아내의 집에 들렀다가 거실에 놓여있던,이 문구가 들어 있는 사진을 보고 신심(信心)이 발동했다.

게다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아내에게 잘 보일 명분도 필요해서 종교를 갖게 됐다. 결혼을 앞두고 예비자 교리를 신청해 열심히 성경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다.

지금의 아내와는 91년 2월 22일 한강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아내와 함께 주일 미사는 거르지 않고 다니는 편이다. 나는 힘들 때 기도할 수 있어 참 좋았다. 누군가와 내 심로를 진지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어디에선가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뭘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천주교 신자가 된 뒤 90년대 초·중반 교도소의 재소자 위문을 많이 다녔다. 영등포·청주교도소 등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가서 수감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도 함께 부르며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말씀' 한다는 게 주제넘는 일 같아서 두렵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형제처럼 편안했다. 죄가 밉지 사람은 밉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다.

영등포교도소에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재소자 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그의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만은 또렷하게 뇌리에 박혀있다. 그가 있어서 그날의 위문 공연은 여느 극장이나 방송국 그것 못지 않게 화기애애할 수 있었다.

교도소 위문 공연은 경기도 용인의 성모교육원 수녀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나는 당시 영화배우 김지미,김씨의 동생 남편으로 자니 브라더스 멤버인 진성만,탤런트 허진과 함께 이곳에서 매주 한번씩 1년반 동안 성경공부를 했다. 김안드레아 수녀가 우리의 선생님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개인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체험을 했다. 한여름 8박 9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채 자신을 돌아보는 '침묵피정(이냐시오피정)'을 마치던 날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너나 할 것없이 지난 허물은 묻어두고 앞으로는 선하게 살자는 깨달음 같은 것이 밀려와 복받친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천주교 신자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모아 매달 첫째 일요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문화예술인 미사'를 드렸다.

이 미사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초창기엔 나와 김지미씨가 회장을, 김병찬·원종배 아나운서가 미사 해설을 맡았다.

이제 고인이 된 탤런트 이낙훈씨를 비롯해 가수 하춘화·윤수일·김수희·인순이·최이철, 탤런트 허진·박경득·장정국·김희애, 뮤지컬 안무·연출가 한익평, 개그맨 임하룡씨 등이 자주 참석했다. 92년엔 '문화예술인 성당'을 만들자는 뜻에서 하얏트호텔에서 기금 마련 콘서트를 열었다.

그러나 공연 성과와 달리 성당을 만들자는 계획은 제대로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각자 본당이 있어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보니 한데 힘을 모으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종교인으로서 봉사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기거하는 안양의 마리아의 집,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를 돕는 아프리카선교회의 봉사 활동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자칫 반대 급부를 생각하고 한다고 오해나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지난 날을 되돌아 보면서 보다 이른 나이에 종교를 가졌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내 인생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무슨 종교를 믿든 그것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큰 힘이 있다. 얻어 먹을 힘만 있으면 주님의 은총인 것을.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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