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구조 변호사제' 첫 수혜자 나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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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송사(訟事)에 휘말렸던 할아버지가 법원이 공짜로 선임해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민사소송을 말끔히 해결했다.

법원이 민사소송의 당사자에게 소송대리인을 연결해주고 국고에서 변호사 수임료를 주는 민사소송법상의 소송구조변호사 제도를 활용한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지난 7월 본격 시행된 이 제도의 첫 수혜자가 됐다.

경기도 수원에서 해장국집을 경영하는 李모(75)씨는 지난 1월 해장국을 먹다 돌을 씹어 어금니 등 치아 세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손님 徐모씨로부터 치료비를 물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徐씨가 청구한 금액은 2백50만원. 조그만 식당을 꾸려가며 용돈 정도 벌어 쓰던 李씨에게는 너무 큰 액수였고 결국 그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다.

徐씨는 법적으로 처리하겠다며 수원지법에 2백5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李씨는 출석명령을 받고 법원에 나갔지만 고령인데다 법률 지식이 없어 徐씨측 주장에 대한 반박은커녕 판사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했다. 때문에 재판은 수개월이 지나도록 진전되지 않았다. 徐씨의 일방적 주장만 되풀이될 뿐 재판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재판부는 李씨에게 변호사를 선임할지 물었으나 그는 변호사 수임료를 낼 만한 형편이 못된다고 밝혔다. 결국 지난 6월 재판부(민사소액11단독 朴正洙판사)는 李씨가 자력으로 재판을 치를 수 없다고 보고 직권으로 소송구조결정을 내려 李씨에게 변호사를 선임해 주었다.

법원이 법률구조공단의 협조를 얻어 李씨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한 변호사는 李씨에게서 "1백만원 정도라면 보상할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徐씨와 협의해 1백10만원에 합의하기로 했다. 李씨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변호사 덕에 소송을 무난히 끝내고 합의금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합의 뒤 李씨측 변호사는 재판부에 10만원의 보수지급 의뢰서를 제출했다. 재판부는 2일 "소송구조 변호사 보수에 관한 규칙에 따라 국가는 10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소송구조결정을 내린 박정수 판사는 "李씨처럼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억울한 경우를 당하게 된다"면서 "이를 막기 위해 구조변호사제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 설범식(薛範植)판사는 "현재는 연간 4백여명에게 국가가 소송대리인을 무료로 선임해줄 수 있지만 앞으로 예산을 더 확보해 그 대상을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송구조제도=민사소송 당사자가 소송 수행능력이 없는 경우 법원이 재판 비용의 납부를 유예해 주거나 국고에서 지원해줌으로써 국민의 재판 청구권을 보장하는 장치다. 얼마 전까지 인지대 납부 능력이 없는 원고측이 소송구조 신청을 하면 재판부가 타당성 검토 뒤 인지대 납부를 유예해 주는 수준으로만 운영돼 왔다. 구조변호사 제도는 구체적인 절차 규정이나 관련 예산이 없어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난 7월 민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소송구조변호사의 세부규정이 마련됐고, 관련 예산 3억원도 배정됐다.

법원은 서울지방변호사회 등의 협조를 얻어 전국 53개 법원마다 3∼30명 등 모두 3백여명의 변호사를 추천받아 소송구조결정을 받은 소송 당사자에게 순번대로 연결해준다. 구조변호사는 심급당 국가로부터 7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소송 당사자가 승소할 경우에도 별도의 성공사례금은 받지 못한다.

전진배 기자

allon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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