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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政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통령선거를 두달 남짓 앞두고 각 진영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추악하고 저질적인 정쟁으로 일관하고 있어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에 넌더리를 치게 만들고 있다. 각종의 유언비어를 유포하다 못해 녹음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를 심심치 않게 거론하는가 하면, 후보 개인에 대한 검증과는 거리가 먼 인척의 과거 행적까지 도마 위에 올려놓는 신판 연좌제의 적용에 열을 내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도덕성을 강조하면서도 도덕성을 의심받는 인물의 발언을 금과옥조처럼 되뇌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어 정치권 전체의 수준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는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사상논쟁과 친일논쟁, 사쿠라논쟁과 같은 저차원의 비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도 상대방의 인격은 존중하며 나름대로의 금도(襟度)는 지켰었다. 밑도 끝도 없는 인신공격으로 날을 지새우는 것만이 아니라 가끔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 정치권 모두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로 인해 국민은 불안을 떨치고 생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최소한도 기본은 지키려는 정치권의 이러한 자세와 이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오늘의 경제를 일궈낸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정쟁의 양상을 볼 때, 정치의 기본이 지켜지지 않고 있어 우리 경제가 활력을 아주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민주화 이후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는 기본적으로 정치인이 미래에 대한 안목과 시대변화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기 때문에 상대방 흠집내기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하고,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를 선도할 비전이 없는 까닭에 질 낮은 정쟁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와 반민주로 양분되는 권위주의 시대에는 정치학 교과서 첫 장에 나오는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만 하더라도 존경받는 정치가로 행세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각론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말머리에 민주주의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용기로 통하고 양심으로 간주되는, 그야말로 척박하기 짝이 없는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체가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이룬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만큼 정치인도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화가 우리 사회의 이목을 집중할 수 있는 이슈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이상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성 없이 막연히 '정치개혁'이니, '국민통합'이니 하는 구호 대신 국가 경륜에 관한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해야만 국민이 납득하고 따르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정쟁의 내용과 수준이 바뀌어야 한다. 첫째, 인신공격에 치중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에서 벗어나 한반도에 평화와 협력을 확고하게 정착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한 경쟁이 돼야 한다. 일본 총리의 방북과 북·미 대화 재개, 그리고 신의주 개방 등으로 한반도와 그 주변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남북관계를 건설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차원에서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체성 확립과도 관계가 있는 것인데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민주화의 완성으로 간주하는 착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민주주의의 제반 가치를 실현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사회균열의 원인과 경위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진정으로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관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론의 모색이 요구되고, 사회균열을 치유하여 국민적 에너지를 국가발전에 집중시킬 수 있는 전략 전술의 제시가 요청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화 이후 국민이 기대하는 정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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