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 내부거래에도 해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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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빌린 돈이 북한에 비밀리에 송금됐다는 의혹의 진실을 파악하려면 현대상선이 그 돈을 어디에 썼느냐를 알아내면 된다. 이를 위해선 현대상선의 금융거래 내역을 추적해봐야 한다. 의혹에 비해 의외로 간단한 해결책이다.

그런데 정부는 금융거래 내역을 추적하는, 이른바 계좌추적을 거부하고 있다. 현행법상 위법이어서 곤란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가 그 근거로 대는 법이 금융실명법 제4조 1항이다. 이에 따르면 '금융기관이 거래 고객의 동의 없이 금융거래 내역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돼 있다. 현대상선이 동의하지 않으면 산은이 거래 내역을 밝힐 수 없다는 얘기다.

이를 근거로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주가 조작과 관련된 분식회계라면 가능하지만 이번 경우는 계좌추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재정경제부도 "구체적인 혐의가 있어야만 계좌추적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가 결심하기에 따라서는 계좌추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금융실명법에 계좌추적을 할 수 있는 예외조항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금융기관을 검사하면서 ▶내부자 거래 및 불공정 거래 행위 조사▶금융사고 조사▶불건전 금융거래 조사▶금융실명법 위반 및 부외(簿外)거래(회계장부에 기장하지 않고,따로 처리한 거래)조사에 필요한 경우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

재경부 관계자도 "금융기관 검사를 하면서 특별한 사항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 직원들은 굳이 예외조항이 아니더라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계좌추적을 해온 게 그동안의 관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감원 노조는 "법에 명시돼 있지 않아도 금감원이 계좌추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조사해 왔다"라며 "실제로 은행이 기업에 시설자금으로 빌려준 돈이 운영자금으로 이용된 경우 법에 명시돼 있지 않지만 계좌추적을 했었다"고 밝혔다.

또 시간이 다소 걸리지만 국회가 관련 국정조사를 열어 조사위원회의 의결로 거래정보의 제공을 요구하는 것도 법으로 허용돼 있다. 산업은행이 진실 규명을 위해 현대상선에 "거래장부 등을 스스로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우회적인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현대상선의 계열사 지원 흐름에 부당한 점이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현행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근거없는 계열사 지원 등 부당 내부거래는 조사 대상이 되며(23조)▶이 경우 공정거래위원회가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게 돼 있다.(49조)

특히 대규모 기업집단의 계열사 조사 때는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50조)

이와 관련,1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한 국회 정무위원회 국감에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은 "현대상선은 2000년 한해 동안 현대아산 등 그룹 계열사에 28건 1조5천5백50억원 규모의 지원을 했다"며 "상황이 이런데 공정위가 2000년 9월 이후 현대에 대한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한번도 하지 않은 것은 권력기관의 압력 때문이란 설이 있다"고 주장했다.

고현곤·최현철 기자

hkk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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