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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소 찾아 다니는 ‘우아한 초현실’에 빠진 시청자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7호 08면

처녀 적엔 유치해서 쳐다보지도 않던 짝짓기 프로그램이 이상하게 아줌마가 된 뒤론 재미있다. 도덕적으로는 물론 법적으로도 불가능해진 로맨스에 대한 대리만족적 심리라고나 할까. 다시 돌아가려도 골치 아파 손사래 칠 20대 청춘남녀의 얽히고설킨 애정관계를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수경의 시시콜콜 미국문화 - 뻔한 짝짓기 프로그램에 매달리는 까닭

요즘 내가 ‘본방사수’ 중인 프로그램은 ABC에서 방영하고 있는 ‘배철러렛(The Bachelorette)’이다. 한 명의 여성을 두고 수많은 남성 참가자가 경쟁을 벌여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커플이 된다. 원래는 한 명의 남성과 다수의 여성이 출연하는 ‘배철러(The Bachelor)’로 시작됐으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자 성별을 바꾸어 스핀오프 시리즈로 제작됐다.

2002년 시작된 ‘배철러’는 지금까지 14시즌이나 제작됐으며 현재는 ‘배철러렛’의 여섯 번째 시즌이 방영 중이다. 이번 시즌에서 여주인공 알리는 스물다섯 명의 남성과 데이트를 계속하며 자신의 짝을 고르는 중이다. 5월 24일에 첫 방영된 이래 현재 두 명으로 후보가 압축됐으며 다음주 대망의 피날레를 앞두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짝짓기 프로그램인 tvN의 ‘러브스위치’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이 얘기일터다. 하지만 ‘배철러렛’은 스케일이 남다르다. 스물여섯 명의 출연자가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 세계의 로맨틱한 관광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데이트를 한다. 이번 시즌에서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된 촬영은 뉴욕, 아이슬란드, 터키, 포르투갈, 타히티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스킨십의 강도다. 여주인공은 방금 전까지 A라는 남성과 키스를 하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더니 조금 뒤엔 B라는 남성과도 아주 난리가 난다. 저 남성 출연자들은 찜찜하지도 않은 걸까. 물어보면 하나같이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다는데, 사랑하는 그녀가 다른 남성과 ‘부비부비’하는 모습을 보고도 참 다들 태연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도 출연자들은 진지하고 정색이다. 여주인공은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다는 숭고한(?) 대의를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이곳에 왔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남자 출연자들은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순수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벌써 한 명의 출연자는 숨겨둔 여자친구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퇴출됐고, 또 다른 한 명은 결국 예전 여자친구에게 돌아가겠다며 자진 하차했다.

사실 이 쇼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사칭한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임은 그동안 탄생시킨 커플들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난 3월 ‘배철러’에서 커플로 탄생한 제이크와 비엔나는 3개월쯤 사귀다 아주 지저분한 이별을 했다. 온갖 타블로이드 신문에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는 인터뷰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지금까지 총 20시즌이 지속되는 동안 딱 한 커플이 실제로 결혼에 골인했을 뿐 나머지는 쇼가 끝나기 무섭게 이별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다른 TV 프로그램에 캐스팅돼 사실상 연예인으로 데뷔했다. 출연자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유명세를 얻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하긴,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일생의 반려자를 찾겠다는 발상 자체가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방송국에서 보내주는 초호화 해외여행을 쫓아다니며 오로지 눈 뜨면 해야 할 일이라곤 연애하는 것뿐이라면 사랑도 그다지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싸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 말도 안 되는 쇼를 계속 보게 되는 것은, 어차피 시청자가 원하는 건 구질구질한 현실보다 우아한 초현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간지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유학하고 있다. 음악과 문화 등 대중문화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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