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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가르는 저 눈빛에 베일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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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경춘(京春)가도는 싱그럽다. 누런 들판과 동무해 달리는 북한강의 잔물결에 투명한 햇살이 내리쬔다. 서울에서 3시간여 달려 닿은 춘천시 의암호의 고구마섬. 영화 '청풍명월'의 촬영장이다. 각종 갑옷과 투구, 칼과 창들이 죽 놓여있다. 조선시대를 무대로 엇갈린 운명의 무사 두 명을 다룰 이번 영화의 규모가 짐작됐다.

# 블록버스터 날개 달다

언덕배기에 세워진 정자를 지나니 두터운 갑옷을 입고 긴 칼을 찬 배우 조재현(37)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갑옷 틈으로 텁텁한 훈기가 새어나온다. "메추리 알을 넣어 익혀 먹을 정도죠"라며 보자마자 엄살을 떤다. 주변에 말 여러 마리가 놀고 있다. 말을 타고 칼을 부리는 무사 역에 처음 도전하는 그의 승마 실력은 얼마나 될까. "마상에서 물구나무서서 달리기 직전"이라며 또 객담을 늘어놓는다.

조재현은 '청풍명월'로 블록버스터에 처음 출연한다. 올 초 히트한 '나쁜 남자' 등 김기덕 감독의 저예산 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그가 제작비 80여억원의 대작을 선택한 것. 이제 흥행배우란 말을 듣고 싶은 것일까.

"그간 못해본 것을 할 따름이죠. 큰 영화의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시간·장비 등 여러 면에서 작은 영화와 비교할 수 없죠. 그렇다고 저예산 영화와 결별? 전혀 아닙니다. 저를 저예산형 배우로만 바라보는 일부의 오해를 씻고 싶습니다."

'결혼 이야기''북경반점'의 김의석 감독이 스태프를 독려한다. 의암호를 시원하게 가로지른 주교(舟橋)에서 이번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두 검객의 운명적 조우가 시작됐다. "액션!"

# 무협 액션에 도전하다

'청풍명월'은 인조 반정 직후의 혼란스런 사회를 바닥에 깔고 어쩔 수 없이 반정(反正·지금으로 치면 쿠데타)군에 잔류, 새 정권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비정한 장수 규엽(조재현)과 선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현왕을 처단하려는 자객 지환(최민수)의 대립이 중심축이다.

이날 촬영분은 새 왕을 처단하려고 왕의 행렬을 급습한 지환을 살리기 위해 규엽이 호위병 대열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 말을 타고 다리 건너편에서 바람을 가르며 달려온 규엽이 호위병에 포위된 지환에게 달려든다. 수차례 반복 끝에 OK 사인이 떨어졌다. 조재현의 이마에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나쁜 남자'의 독기 어린 눈빛에 반해 조재현을 캐스팅했어요. 그 판단이 옳았다는 걸 요즘 실감합니다. 규엽은 반정이 일어나면서 삶을 포기한 인물이거든요.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은 대신 속으론 분노가 들끓는 규엽역에 최적이죠"라며 감독이 그를 치켜세웠다.

"숱한 액션의 90%를 대역 없이 연기했어요. 저도 멋진 사나이라는 걸 보여줄 겁니다. 사실 저에 대한 기대가 커요. 예전 작품과 장르가 다르고 무협도 처음이라 긴장도 되지만 힘든 액션을 소화했을 때의 성취감이란…."

곁에 있던 최민수(40)가 미소를 지었다. "10년 전 내가 주연할 때, 너는 단역에 불과했는데, 그래도 고생 끝에 빛을 보니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조재현의 대답. "형, 내 후배가 이렇게 크는 것을 보면 나도 흐뭇해지겠지."

# 역사 속으로 뛰어들다

제목의 청풍명월은 가상의 무관 양성소. 이곳에서 두터운 우정을 쌓았던 지환과 규엽은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적으로 맞서게 된다. 이날의 백미는 규엽이 죽음을 무릅쓰고 죽기 직전의 지환을 데리고 호위병 대열을 뚫고 지나가는 장면. 혼란스런 시대에 친구와 갈라질 수밖에 없었던 규엽이 지위 대신 우정을 최종 선택하는 것. 빗발치는 화살이 장관이다.

조재현에겐 첫 사극이란 의미가 있다. "정통 사극이었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겁니다. 배경은 조선 중기나 영화는 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20여년 전 광주 민주항쟁을 떠올려 볼까요. 시위대 대학생과 계엄 진압군으로 만난 친구를 생각해 보세요. 지환과 규엽은 그런 역사의 희생양입니다. '청풍명월'은 무협영화보다 역사를 반추하는 드라마에 가깝죠. 바로 우리의 얘기인 겁니다."

그는 자기 자랑도 잊지 않았다. "민수형이 맡은 지환은 충성심 하나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매우 멋있어 보이나 선왕 한명밖에 모르죠. 그런데 규엽은 스승마저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복합적 캐릭터입니다. 자기와 또 다른 현실과 싸우는 셈이죠. 그래서 제게 더 맞습니다."

카리스마의 최민수가 살짝 웃는다. 의암호에서 노닐던 백로 두 마리가 분주한 촬영장을 바라본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청풍명월'은 세트도 눈길을 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위해 폭 5m, 길이 2백50m의 주교를 건설했다. 나룻배 37척을 일렬로 잇고, 그 위에 수천장의 널빤지를 깔았다. 총 건설비는 10억원. 영화 전체 제작비가 80억원이니 이번 세트에 대한 제작진의 관심을 보여준다.

이 주교는 조선 시대 임금의 행차 재현을 위해 마련됐다. 연인원 1천4백여명의 엑스트라가 참여한 어가행렬(御駕行列) 재연은 지난주 닷새에 걸쳐 진행됐다. 행렬의 웅장한 모습을 잡기 위해 헬기가 동원됐고, 메인 카메라 두대와 보조 카메라 한대가 작동됐다. 현재 절반 정도 촬영을 마친 '청풍명월'은 내년 3월께 개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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