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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1>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35. 뮤지컬 배우 활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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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통닭을 사라, 통닭을 사라." 합창단 코러스 가운데 한 사람인 황철(테너)씨는 공연 도중 내 대사를 흉내내며 이렇게 외쳤다. 물론 객석에는 들리지 않았지만,혹시나 해서 늘 불안했다.

황씨가 나를 골탕먹인 문제의 대사는 "파겁을 해라,파겁을 해라"였다. 제주의 명기(名妓) 애랑에 반해 욕망이냐 '공무원'으로서의 명분이냐를 놓고 갈등하는 배비장에게 과감히 일탈을 주문하는 대사였다. 황씨는 이걸 '통닭'으로 바꿔서 나를 놀렸다. 결국 공연이 끝나면 통닭을 사주면서 그와 단원들을 달랬다.

1971년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출연 시절의 이야기다. 그해 1월 나는 팔자에도 없었던 뮤지컬 배우로 데뷔했다.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인기있는 스타였기에 주인공 배비장 역은 내 몫이었다.

나를 홀리는 상대 역은 여가수 김하정이었다. 초대 국립무용단장을 지낸 임성남씨가 연출을 했고 음악은 최창권씨가 맡았다. 최불암·김희갑·곽규석(후라이보이)씨 등이 함께 출연했다.

원래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예그린 악단)로 66년에 시민회관 무대에 올랐다. 임영웅 연출로,한상림·패티 김이 주역이었다.

패티 김은 주제곡 '살짜기 옵서예'(김영수 작사·최창권 작곡)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당신 생각에 부풀은 이 가슴 살짜기 살짜기 살짜기 옵서예…"로 시작하는 노래다. 이후 수차례 재공연되면서 애랑 역은 패티 김·김상희·김하정·배인숙·이정화(뮤지컬 배우) 등으로 이어졌다.

내가 출연할 당시 최불암씨가 연기 선생님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사 한마디가 있다. 몸종을 꾸짖는 "어어, 참 소갈머리 없는 녀석이군"하는 대사였다. 처음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삐질삐질 온몸에서 땀이 났다. 최씨는 이런 나에게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중요한 단어에 강세를 주어 대사의 리듬감을 살려보라는 주문이었다. 몇날을 연습하니 자신감이 생겼고, 이 보다 더 어려운 대사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었다.

사실 대사나 연기보다도 나를 더욱 괴롭힌 것은 분장이었다. 나는 정말로 얼굴에 분칠을 하는 게 싫었다. 극장 공연이나 TV에 출연할 때도 분장만은 극구 사양해온 나였다.

나처럼 분장에 염증을 낸 가수 가운데는 현인 선배가 있다. 이런 우리를 질타한 사람이 원로 코미디언 이종철씨였다. "연기자나 가수 모두 광대야. 광대는 비로소 분장을 해야 제몫을 하는 거지." 이씨의 지론이었다.

물론 광대가 되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서 이물감이 느껴지는 게 싫어서였다. 그런 나도 배우로 무대에 서면서 그걸 안 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 뮤지컬에 출연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가수는 개인 예술이었지만, 뮤지컬은 그야말로 집단 예술이었다. 나 혼자 잘 났다고 되는 게 절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가 일궈내는 하모니처럼 출연자들의 합심이 없으면 좋은 작품이 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과정이 좋아야 결과도 좋았다.

당초 출연 제의가 왔을 때 나는 상당히 망설였다. 연예협회 가수 분과 위원장을 할 때였는데,많은 고민을 하다 결정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자극했다. 앞에서 말했듯이,점차 집단예술의 매력에 빠지면서 출연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경험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지금도 여전히 전성기라면 나는 보다 많은 뮤지컬에 출연했을 것이다. 요즘 뮤지컬이 득세하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뮤지컬 안무가 겸 연출가인 친구 한익평을 만나면 내 역 하나 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나이 든 선배의 노파심인가. 나름대로 끼와 재주를 가진 후배 가수들을 보면, 기회가 있을 때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인생이 어차피 도전의 연속이라면 젊은 시절 재능을 썩히지 말라는 것이다.

노래 하나 하기도 바쁜 형편이라지만 스스로 자기의 재능을 실험하지 않고는 누가 나를 알아주겠는가. 우물 안 개구리 처럼 자기 세계에만 빠져있지 말아라.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심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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