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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머리가 즐거운 영화 찍어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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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박광수(57) 감독이 3년 만에 기지개를 켠다. 1901년 일어난 제주민란을 다룬 '이재수의 난'(99년)의 실패로 충무로와 멀어졌던 그가 신작 '방아쇠'로 재기를 노린다. 비무장지대의 경계초소(GP)를 무대로 주일병(주진모)과 처녀 귀신(정애연)의 사랑을 그릴 '방아쇠'는 사실주의적 현실 비판을 견지해온 그가 초현실적인 소재를 처음으로 도입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데뷔작 '칠수와 만수'(88년) 이후 '그들도 우리처럼'(90년),'그 섬에 가고 싶다'(93년),'아름다운 청년 전태일'(95년)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노동·빈민·분단·이념 문제를 지속적으로 파고들었던 그가 과연 달라진 것일까. 90년대 우리 영화계의 사회파 감독으로 작가 영화의 맥을 든든히 이어왔던 그의 변신이 성공적으로 이뤄질지 기대된다. 다음달 초 울산시 울주군의 6만여평 억새밭에 야외 세트를 짓고 촬영에 들어가는 박감독을 만났다.

-귀신이 등장한다. 의도가 있을 것 같다.

"귀신은 요즘으로 치면 사이버 공간과 비슷하다. 있는 듯 없는 듯 설명하기 어렵다. 비무장 지대도 마찬가지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공간이지만 현실적으론 엄존한다. 그곳의 군인도 그렇다. 이름·주소·본적은 있지만 자기 생활은 없다."

-비무장지대를 부정하는가.

"아니다. 다만 특수한 공간임은 분명하다. 군인은 고립된 생활을 하지만 GP 밖만 나가면 원시의 자연이 펼쳐진다. 또 대북·대남 방송이 서로 싸운다. 20대부터 이곳을 다룰 생각을 했다. 남자만 나오면 건조할 것 같아 처녀 귀신을 삽입했다. GP에서 근무한 병사들이 인터넷에 올려 놓은 글을 보면 귀신 얘기가 종종 띈다."

-감독이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할 순 없다. 그러나 관심사는 달라졌다. 사회가, 그리고 영화계가 변하는데 나만 그대로일 수 있겠는가. 이번엔 재미를 많이 추가할 것이다. 내 영화를 보는 관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예전엔 해외 영화제나 해외 마케팅에 주력했다."

-재미라면 어떤 재미?

"크게 세가지다. 첫째, 공간의 특수성이다. 비무장지대란 상식밖의 지역을 다룬다. 둘째, 귀신과 인간의 사랑이다. 과연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셋째, 군인들 상호간에 빚어지는 드라마다."

-진한 섹스신도 나온다는데….

"그렇다. 여러 장면에서 노출된다. 나로선 첫 시도다. 하지만 어떻게 화면을 꾸릴지는 아직 말할 수 없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성이 주요 모티브인 건 확실하다."

-자극적 요소도 필요하다는 뜻인가.

"그건 오해다. 중요한 건 셋째 부분이다. 병사들의 다양한 인간 관계를 통해 성·이념·폭력 등의 문제를 여러 형태로 보여줄 것이다."

-여전히 무거워 보인다. 젊은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20대 초반의 얘기다. 젊은이들의 시선을 유지할 것이다. 거의 모든 젊은이가 군대를 가지 않는가. 그들이 궁금해하고, 피부로 느끼는 점을 다룰 것이다."

-형식에서도 변하는가.

"그렇다. 예전보다 컷 수를 줄여 장면 장면을 짧게 가져 갈 것이다. 속도감 있게 끌어간다는 말이다.이전엔 나눌 이유가 분명치 않은 장면에선 롱테이크(길게 찍기)를 고집했으나 이번엔 한 장면 한 컷으로 몰고 간다.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카메라 이동도 자유롭다. 두 세명의 관점으로 작품을 풀어갔던 방식도 크게 바꿨다. 그간 단편영화 두편을 제작하고, 인터넷도 자주 검색하고, 컴퓨터 게임도 해보니 이제 긴 화면은 내가 지루해서 못보겠다."

-뮤직비디오도 찍을 태세다.

"농담이겠지, 누가 그걸 내게 맡기겠나. 하여간 분기점임엔 틀림없다. 지난 10여년간 우리의 과거를 돌아본 시대극에 주력했다면 이번엔 오늘을 직시한 현대물이란 점에서 큰 도전이다. 정치적 억압, 영화적 검열이 사라진 요즘 내 관심이 현실을 넘어선 팬터지까지 확장됐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캐스팅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주연 배우가 세차례 변경됐다. 함께 술도 마시며 최종 동의까지 얻었는데 막판에 뒤집힌 적이 있었다. 매니저의 파워가 급증한 걸 실감했다. 한국만큼 배우 개런티가 높은 곳도 없을 것이다. 이러다간 충무로가 무너질 수 있다. 일본처럼 스타들도 1일 출연, 촬영 횟수당 출연료 지급 등의 체제를 갖춰야 한다."

-배우 훈련이 철저한 것으로 유명하다.

"항상 숙제를 내준다. 캐릭터 분석, 상황 설정 등을 요구한다. A4 용지로 열장 정도 써오는 적도 있다. 또 그들이 대사를 만들도록 유도한다. 주진모는 친구가 써준 걸 갖고 와서 한번 웃은 적이 있다. 어차피 영화는 배우로 표현되는 것이다."

글=박정호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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