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은 어떤 은행 원하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아니, 이 시간에 문을 엽니까?" "저희 코머스 뱅크(Commerce Bank)는 오전 7시30분에 영업을 시작합니다" .

몇 주 전 뉴욕 출장 중에 있었던 일이다. 아침 운동을 하던 중에 환하게 불이 켜진 은행을 발견했다. 몇몇 고객들과 함께 들어가 보았더니 폐점 시간은 오후 8시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게다가 주5일제 근무가 뼛속까지 정착된 뉴욕 한복판에서 토요일(7:30∼18:00) 일요일(11:30∼16:00)에도 영업을 한다는 것이다.

정복을 한 여성 지점장은 필자를 반갑게 응대하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뉴욕은 잠들지 않는 도시입니다. 예외는 오후 3∼4시에 문을 닫는 은행들뿐이지요. 바쁜 직장인들이 출근 전이나 후에 여유 있게 은행에 들러 일을 처리하고, 또 주중에 시간이 없는 고객들은 주말에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코머스 뱅크의 회장이자 창업주인 버넌 힐 2세는 은행가의 꿈을 품고 1973년 뉴저지주 체리 힐에서 조그마한 동네 은행인 코머스 뱅크를 차렸다고 한다. 힐 회장은 뭉칫돈이 오가는 기업금융을 주로 하는 전국 규모의 은행이 아니라, 월마트나 스타벅스 커피숍처럼 '편리한 은행'을 목표로 삼았다. 파격적인 영업시간 연장뿐만 아니라 단골 고객들의 적금, 상업대출, 주택 금융 등에 중점을 두고 각종 수수료를 과감하게 폐지해 틈새를 공략했다.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처럼 차를 타고 가면서 은행을 이용할 수 있는 드라이브 스루 코너도 시도했다.

인수·합병으로 은행 규모를 단번에 키우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점을 개척해 현재 2백여개로 증가했으며 2005년에는 4백여 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냥 친절한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놀랄 정도로 친절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직원들의 서비스 제안에 매번 50달러씩 포상하면서 미비점을 보완해 나간 것도 주요했다고 한다. 당연히 고객 위주 서비스를 하다 보니, 초창기에는 다른 은행보다 운영비가 더 들어갔다. 그러나 95년 이후 고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은행의 주식가치가 덩달아 뛰어 더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5백대 우량기업의 연 평균 주식가치 증가율이 13%에 머물렀지만, 이 은행은 36%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 은행의 독특한 경영방식이 일려지면서 월 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와 같은 미국 주요 언론은 앞다퉈 대서특필하고 '미국 최고의 은행'이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은 미 동부 5개 주에만 영업망을 펴고 있는 지역은행 코머스 뱅크가 앞으로 '편리함'과 '친절'을 무기로 얼마나 커나갈지 미국 재계와 국민들은 애정어린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

코머스 뱅크를 나오면서 모든 은행이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하는 획일화된 한국의 현실이 떠올랐다. 지금 정부·재계·노동계는 전 사업장의 주5일 근로제 입법을 앞두고 찬반론에 휩싸여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굴지의 은행과의 경쟁에서 코머스 뱅크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은 은행방침에 고객은 무조건 따르라는 일방적 통보가 아니라, 고객을 위해서라면 아침부터 밤까지 3백65일 문을 열고 기다리겠다는 인식의 전환, 획기적 경영전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비단 코머스 뱅크뿐 아니라 서부 18개 주에 거점을 두고 있는 유에스 뱅크(US Bank)도 2백50여개의 지점이 주7일제 근무를 하면서 고객을 유인하고 있다.

이제 국내 은행들도 '세계 수준의 소매금융기관'이 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키우면서 국제시장을 누빌 꿈을 키우고 있다. 이 시점에서 무한 경쟁에 돌입한 우리 은행들은 고객을 사로잡을 비장의 경영비법이 무엇인지, 진정한 의미의 차별화 전략은 있는지, 은행의 입장이 아닌 고객의 입장에서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코머스 뱅크를 능가하는 편리한 은행, 친절한 은행, 고객을 왕으로 대접하는 은행이 우리 나라에도 하루빨리 정착하기를 고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