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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적' 여성 본성 추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여성의 '존재 이전'이라고 할까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스스로 길을 떠나는 존재 같은 것,

여주인공에게서 그런 여성상을 발견했다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2부와 '숨결'을 통해 종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던 변영주(36)감독이 장편 극영화에 데뷔했다. 전경린씨의 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밀애'라는 제목으로 스크린에 옮긴 것.

약 석달간의 촬영을 마치고 최근 편집 작업에 들어간 변감독은 예의 자신만만하고 호방한 모습으로 기자를 만났다.

원작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서른세살 여성(미흔)이 마흔살 먹은 시골 우체국장(규)과 열애에 빠져들게 된다는 스토리.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직업을 시골 보건소 의사로 바꾸었단다.

종군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다큐에서는 매춘여성의 문제를 건드리기도 했던 변감독인 만큼 자칫 삼류 치정물로 떨어질 수 있는 불륜을 소재로 했다는 게 뜻밖이었다.

"소설을 읽고 처음엔 미흔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궁상을 떠나 싶었다. 외도한 남편과 못살겠다면 그냥 이혼하고 좀 주체적으로 살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몇달간 시나리오를 다듬다 보니 언제부턴가 미흔이가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여성의 이동을 영화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여성의 이동?

"여성의 '존재 이전(移轉)'이라고 할까. 전경린씨의 또 다른 작품인 '배가 떠나네'에도 그런 표현이 나오는데 유목민적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말이다. 즉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스스로 길을 떠나는 존재 같은 것, 미흔에게서 그런 여성상을 발견했다. 비록 남편과 한 집에 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떠돌아다니고 부유하는 현대 여성의 성격이 그녀에게 녹아 있다."

-극영화는 처음인데, 힘들지 않았나.

"현장에 갔더니 50명이 넘는 스태프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처음엔 눈앞이 캄캄하더라. 다큐멘터리는 기껏해야 여덟명 정도가 팀이 돼 움직이지 않는가. 차츰 상황에 익숙해지자 극영화의 주인공은 역시 배우라는 게 실감났다. 다큐멘터리는 처음부터 카메라에 담아야 할 '살아있는 인간'이 존재한다. 실재하는 인물의 움직임과 감정의 변화를 찍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극영화에서는 캐스팅이 되기 전까지 시나리오 속 인물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주인공으로 김윤진을 캐스팅하면서 비로소 미흔이 먹고 숨쉬고 사랑하는, 현실 속 인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독립영화계에서 서운해 하지 않나.

"진작에 극영화를 할 거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 않았을 거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하면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무조건적인 지지였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다. "참 어려운 일 해내셨습니다. 영화는 못 봤지만…." 도대체 작품을 안 보고 무슨 공치사란 말인가. 독립영화에 대해서는 비평가든 관객이든 오직 찬사밖에 늘어놓을 줄 모른다. 그러니 작품을 완성해도 재미가 없다. 어떤 점이 좋거나 나쁘다고 지적하면서 논쟁을 해야 발전하는 게 아닌가. 지지와 지원은 분명 다른데도 그걸 구별 못한다. 이번 '밀애'의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독립영화 쪽에서 지지받지 못할 인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정면승부를 하는 셈이다. 사전에 덤으로 먹고 들어가는 것 없이, 오직 영화로만 평가받고 싶다는 거다.난 다른 눈치는 안 본다."

-영화사에서는 '격정 멜로물'이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소설도 그렇지만 영화에서도 여주인공 미흔은 규와의 만남, 특히 정사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느끼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정사 장면이 유달리 많고 이를 통해 주인공의 감정변화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두 사람이 여관에서 정을 나누는 장면은 32시간에 걸쳐 찍었을 정도다. 다행히 남자 주인공을 맡은 이종원씨와 김윤진씨의 호흡이 아주 좋았다. 섹스 신이야말로 액션 신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액션영화에서 주먹으로 치면 상대 얼굴이 제때 돌아가야 하지 않나. 정사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배우들의 호흡이 아주 중요하다."

변감독은 이종원을 '같은 대사를 웃으면서 할 수도, 울면서 할 수도 있는 배우', 김윤진은 '한 얼굴에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배우'라고 평가했다. 변감독의 이 말이 입에 발린 말인지 참말인지는, 오는 11월 영화가 개봉되면 확인할 수 있겠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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