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모르게 추락하는 '그들끼리의 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술은 일상의 장엄한 잔치"라는 고은 시인의 말이 요즘 화제다. 잘디 잘아진 삶에 던져진 시인다운 발언이었지만 고은이 젊었을 적 한번은 작당을 했다고 한다. 평론가 김현·염무웅과 함께 였다. "김수영 집에 쳐들어가자." 거나한 술기운에 서울 구수동의 선배를 찾았지만, 김수영은 대뜸 고함부터 질러댔다. "밤새 공부해도 될까말까 한데 이게 뭐하는 짓들이야."

머쓱한 표정의 후배들을 반시간이 넘게 마당에 세워놓고 "한국문학이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게 끼리끼리 술 먹고 노는 병폐 때문"이라며 대갈일성을 하던 그도 알고보면 폭주가였다. 하지만 그에 앞서 김수영은 무엇보다 엄격한 사부였다는 게 최하림의 『김수영 평전』(실천문학,2001)의 증언이다. 그 얘기는 1968년 6월, 즉 김수영이 죽기 며칠 전의 일화다. "오빠 세상살이는 기승의 연속"이라는 여동생 수명의 증언과 함께 오래 기억될 김수영 문학 최고의 명제는 따로 있다.

'살아 있는 모든 문화는 불온하다'. 근현대 문학이 거둬들인 가장 기운 펄펄한 발언이다. 문학하는 이라면 그가 세상과 어떻게 만나야 하나를 보여주는 원력(願力)이 담긴 말이다. 버스에 치여 횡사하던 날 밤에도 김수영은 작가 이병주와 대작을 했다. 이병주가 몰던 빨간색 볼보를 탄 채 술집을 누볐던 60년대까지만 해도 김수영을 포함한 문학하는 이들은 한국사회의 최고 엘리트였다. 지적 배경이 그랬고, 노는 품도 달랐다.

하지만 예전 문화 영역의 황제였던 문학장르는 요즘 흔들리고 있다. 다매체 다채널의 이 시대에 정보화 물결에 밀리고 영상 장르에 치여 요즘 어느 누가 문학을 화제로 삼는지 궁금하다. 동종(同種)번식의 음습한 울타리 속의 열패감(劣敗感)은 문단 내부에 더욱 심하다. 꼭 한달 전에 출간됐던 젊은 문학평론가 9명의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이런 구조 속에서 나온 내부자 고발의 목소리였다.

이미 5천부가 넘게 팔린 그 책은 바닥 모르게 추락 중인 문학, 그 내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들끼리의 문학'이 어떻게 학연·지연으로 갈라져 자기사람 키워주기에 여념이 없는지를 밝힌 것이다. 책 제목 '주례사 비평'은 그래서 나온다. 출판사들은 억지 스타 몇명을 내세우고, 평론가들은 이들을 마냥 띄워준다. 이때 비평은 과잉해석으로 범벅이 돼 해독조차 어려운 암호의 수준이다. 한때 평단을 주름잡았던 김현 특유의 감각과 현학 취미의 비평문장이 질 낮은 형태로 동어반복이 되고있는 것이다.

비평집이 가장 팔리지 않는 책이 된 것은 당연하다. 독자들이 눈치를 채버린 것이다. 소설도 그렇다. 올해의 경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열린책들)는 40만부(20만질)나 팔렸는데, 각각 『J이야기』나 『상속』을 펴낸 신경숙·은희경 등 여성 스타작가들의 위력이 많이 떨어졌다. 여기에 나머지 중견들인 김영하·윤대녕·박상우·이순원·구효서·함정임 등은 등의 소설집은 1만부 수준에서 힘들게 턱걸이를 하는 게 보통이다.

"문학은 문학 전문가들끼리의 특수문화가 돼버렸다. 백성과 아무런 연분도 없어졌다. 그들은 그들대로 만백성의 살림마음인 대지를 이탈해 마치 무리떼 지은 하루살이의 덩어리처럼 하늘 높이 달아나고 있다." 오래 전 시인 신동엽이 문단 내 패거리 정치꾼들을 향해 뱉어낸 독설이 바로 요즘 다시 생각난다. "비평문학의 부패와 악취는 이제는 어떤 방부제로도 막을 수 없는 지경이다"는 중진평론가 임헌영의 최근 개탄도 바로 그 맥락이다. 그 개탄은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인용되고 있다.

기자의 이런 지적은 문학에 대한 애정을 전제로 한다. 제아무리 영상시대라고 해도 문학은 의연히 우리 문화의 균형 추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엘리트 문학은 더 높고 장엄한 고공비행을 하며, 문화의 생물학적 종(種)의 다양성을 높이는 구실을 해야 한다. 이와 함께 문학 저변을 확대할 대중문학 장르도 영화 등 영상장르의 밑천이 되는 콘텐츠 생산의 원동력이 돼야 옳다. 그 점에서 '그들끼리의 문학' 구조의 수술은 급선무다. 고은의 말대로 이왕 먹는 술이라면 한번 제대로 술판을 벌여볼 일이다. 이런 문학 구조를 어떻게 갈아엎고, 독자들의 사랑을 다시 받을까를 고민하는 술자리가 되도록 말이다.

출판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