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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MB의 변신은 무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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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변신 무죄’의 원조는 DJ다. 외환위기 때인 1997년 말 대통령 당선 직후 DJ는 ‘IMF 플러스’를 받아들였다. IMF 플러스는 애초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이 해줬다고 붙은 이름이다. 정리해고제 수용, 집단소송제 도입, 적대적 인수합병(M&A) 허용 등이 그것이다. 그중 정리해고제 수용은 DJ에게 정말 ‘못할 짓’이었다. 우선 신뢰를 저버려야 했다. 당시 그는 ‘정리해고제 2년 유예’를 공약하고 당선됐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IMF 플러스를 받아들인 것이다. ‘노동자의 대부’가 ‘재계의 옹호자’로 전향했다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지지세력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DJ는 변신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게 나라가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변신엔 보상이 따른다. 정리해고는 오랜 시간 재계의 숙원이었다. 숙원을 풀어준 DJ는 재계에 반대급부를 요구할 수 있었다. 빅딜이나 재벌 개혁, 강한 구조조정이 그것이다. DJ정권이 2년 만에 IMF 체제를 졸업한 데는 이런 ‘변신의 힘’이 밑바탕이 됐다.

‘변신 무죄’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도 빼놓을 수 없다. 애초 그는 반재벌이었다. 당선자 시절엔 서슬이 퍼랬다. “최초로 재벌 개혁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취임 후 변신했다. 해외순방 때면 친기업이 됐다. 기업 예찬론자 뺨쳤다. 2004년 9월 러시아 방문 때는 “기업이 곧 나라”라고 했다. 이후 “우리 기업들이 정말 참 자랑스럽다”(2004년 10월 인도 교포간담회), “해외에 나와 보니 우리 기업들이 정말 애국자라는 생각이 든다”(2004년 11월 브라질 방문)고 되뇌었다. 그러나 변신의 성과는 별로였다. 퇴임 때까지 재계와 불편했다. 해외에서와 달리 국내에선 재벌 혼내주기를 계속해서다.

절정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대다수 측근이 반대했지만 밀어붙였다. 막판 협상 결렬 위기 땐 직접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통화해 절충안을 내놨다.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역시 지지세력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지만 노무현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게 한국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변신 무죄’의 도전자는 MB다. “분배보다 성장”이라던 정권 초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는 요즘 간데없다. 대신 그 자리를 친서민이 차지했다. 친서민을 워낙 강조하다 보니 친기업은커녕 반기업에 가까운 발언이 부쩍 늘었을 정도다. “대기업의 현금 보유량이 많은데 투자를 않으니 서민이 더 힘들다” “대기업이 하는 캐피털이 이렇게 이자를 많이 받으면 나쁘다고 나는 본다” 등등.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 놓고 청와대는 “과거 정권의 포퓰리즘이나 대기업 때리기와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분배 우선주의와도 다르단다. 이해는 간다. 뒤통수가 켕겨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어정쩡하다. 차라리 대놓고 “성장보다 분배”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대기업에서 받아 서민에게 나눠주자”며 지지세력의 희생을 자신 있게 요구하는 것도 좋다. 그래야 진정성이 생긴다. 그래야 변신도 성공할 수 있다. 그뿐이랴. 또 다른 전통을 세울 수도 있다. ‘자기 희생적 대통령’의 전통이다. 지지세력엔 희생을 요구하지만, 나라엔 큰 이득이 되는 일을 한 건씩 해치우는 대통령 말이다. 이미 DJ도 했고, 노무현도 했다. 이번엔 MB 차례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