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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1>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25.개성파, 약진 앞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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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한명숙·현미와 함께 1960년대 초·중반에 맹활약한 개성있는 가수로 이춘희와 이금희를 꼽을 수 있다. 한씨와 현씨처럼 두 사람도 라이벌이었다. 이름 끝에 '희'자가 들어가지만 자매는 아니다. 연배로 치면 한씨와 현씨보다 조금 아래였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이춘희는 '정열의 꽃' 등 스패니시 계통의 노래를 잘 불렀다. 손석우씨가 작곡한 '플라멩코 아가씨'도 스패니시 계통이었다. 반면 이금희는 폴 앵카 노래에 일가견이 있었다. '다이애나''싱 싱 싱' 등 빠르고 경쾌한 노래를 잘 소화했다.

두 사람 모두 괄괄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으나 노래 스타일은 좀 달랐다. 이춘희가 섬세한 편이었다면, 이금희는 박력과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앙코르에 관한 한 이금희는 지금도 나에게 지워지지 않은 기억 하나를 각인시켜 놓았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녀만큼 앙코르를 많이 받은 가수를 보지 못했다. 미 8군 쇼이든, 일반 극장 공연이든 무대를 가리지 않고 이금희는 정말 정열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공연을 마치고 나면 땀으로 범벅이 된 드레스를 짜야할 정도였다. 웬만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금희의 대표곡은 66년에 나온 '키다리 미스터 김'이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 싱겁게 키는 크지만/그래도 미스터 김은 마음씨 그만이예요/세상에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이 없다고 말들 하지만/그러나 그이는 그렇지 않아요 정말로 멋쟁이예요…."

이들보다 선배급으로 50년대 후반에 등장해 여전히 인기가 있던 여자 가수는 권혜경이었다. 권씨는 은행원을 하다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권씨는 문학 소녀같은 센티한 분위기의 노래를 잘 소화했는데 실제 모습도 그랬다. 50년대 후반에 나와 지금도 여전히 애창되고 있는 '산장의 여인'이 그녀의 대표곡이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 있네…."

이밖에 박재란·김상희·곽순옥·문주란·송춘희 등도 스타 여가수로 한자리를 차지했다. 패티 김과 이미자가 대형가수로 확실한 입지를 굳혀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곽순옥은 한운사 작사·박춘석 작곡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성가를 높였다. 80년대 KBS의 남북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서 주제곡처럼 쓰인 바로 그 노래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의 빛나는 눈/고은 마음씨는 달덩이 같이/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이 연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이 노래는 신영균·최무룡 주연의 영화 '남과 북'의 주제곡이었다. 한 여자를 사이고 두고 갈등하는 두 사내의 이야기를 분단의 현실과 상통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애절한 톤이 가미된 곽씨의 이 노래를 들으며 통일을 염원하던 주변 이산가족들의 모습이 선하다.

문주란은 59년에 개국한 부산 MBC가 발굴한 가수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독특한 목소리의 10대 가수'로 이목이 집중됐다.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를 깊이 있는 저음의 자기 스타일로 불러 인기를 끌었다. 현미의 노래도 그녀의 목소리를 거치면 전혀 다른 노래처럼 들렸다. 송춘희는 60년대 중반 '수덕사의 여승'으로 인기 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이런 개성있는 여자 가수들의 등장으로 60년대 가요계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미자씨는 우뚝 도드라진 존재였다. 내 노래 '맨발의 청춘'이 나올 무렵인 64년에 발표된 '동백아가씨'를 통해 이씨는 '가왕(歌王)'으로서 시대를 풍미했다. 나는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와 맞붙었던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때 처럼 다시 여풍(女風)을 만난 셈인데 정말 그 위력은 대단했다.

'동백아가씨'는 2년 뒤 왜색 가요 시비에 휘말려 금지곡 처분을 받는 등 곡절도 겪었지만 대중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이 노래의 성공 이후 '한산도 작사·백영호 작곡·이미자 노래'라는 공식이 가요계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미자씨의 노래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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