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소년의 '서바이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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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고 폐허만 남은 폴란드의 한 게토. 그 안에 홀로 남겨진 소년이 있었다. 수용소로 가기 전 아버지는 "78번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남겼다. 일주일, 한달…. 78번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열두살 알렉스는 다른 가족이 숨겨놓은 식량을 찾아내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해 갔다.

그러나 바로 옆 은신처에 살던 그라인네 가족도 믿을 수 없었다. 언제 누가 밀고자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토 구석구석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식료품을 찾고 때로는 빼앗기도 했다. 물론 수색 작전에 나서는 독일군은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알렉스에게는 아버지가 주고간 권총과 애완쥐 스노우가 의지가 됐다. 78번지와 달리 바로 옆 폴란드인 지구는 사람 사는 곳 같았다. 매일 숙제를 하는 여자아이가 창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고, 식료품을 사러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숙제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알렉스는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천진해야 할 시절, 알렉스는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유대인 작가 오를레브도 제2차대전 당시 알렉스 같은 아이였다. 오를레브는 아버지가 러시아군에 붙잡혀 가고 어머니는 나치 손에 죽고, 게토에서 이모한테 돌봐지다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 살면서 어린이책 작가가 됐다. 오를레브는 숨어지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시 기쁨을 주었던 것은 게토의 다른 집들에서 찾아낸 책들. 로빈슨 크루소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78번지는 생존과 함께 고독과도 싸워야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같다. 열두살 소년에게 너무 가혹한 소설 설정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현실이었다.

급기야 알렉스는 유대인 반란군을 쫓아온 독일군을 쏴죽이고, 부상한 반란군을 위해 폴란드인 지구까지 들어가 의사를 데리고 올 정도로 용감해진다. 폴란드인 지구에서 소녀 스타샤를 만나 우정을 나누는 장면은 어두운 현실을 비추는 찬란한 햇살 같은 대목. 알렉스는 5개월여의 은둔생활이 자신을 성장하게 해주었고 아버지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가장 큰 힘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오를레브는 어린이책의 노벨상이라는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작가다. 이 작품으로 미국에서 비영어권 작품에 주는 배첼더상을 받기도 했다. 단문의 깔끔한 문장은 전개가 빨라 지루해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상황을 옮겨놓은 만큼 힘이 있고, 배경인 그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의 독자에게도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정과 희망을 느끼게 해준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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