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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추적] 골동품 장물업자 “사간 사람 면회 안 와 괘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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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그때 나한테 도난 문화재를 사갔던 사람들을 전부 불겠소. 입 다물어 줬더니 면회 한 번 안 오고…, 괘씸한 것들.”

지난 3월 말 김모(47)씨가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를 찾아왔다. 도난당한 문화재를 불법으로 사들여 판매한 혐의로 구속됐던 김씨는 2007년 자신을 직접 조사한 경찰관에게 이같이 말했다.

한 달 뒤 골동품업자 구모(65)씨가 운영하는 대구의 골동품 가게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기도 과천, 충남 아산 등 전국 10곳의 골동품 가게와 창고 등에서도 일제히 압수수색이 실시됐다. 경찰이 이날 압수한 고서 등 문화재는 1200여 점. 이 중에는 조선왕조 22대 왕 정조 시절 편찬된 왕실도서 『어정주서백선(御定朱書百選)』, 궁중 병풍 등 사료 가치가 높은 문화재가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수천만원에 거래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것들로, 모두 장물업자 김씨가 유통한 도난 문화재였다. 김씨와 경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7년 7월 문화재 전문 털이범과 장물업자 16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2005~2007년 전국 100여 곳에서 4000여 점의 문화재를 훔쳐 불법 유통한 혐의였다.

경찰은 이 중 문화재를 직접 훔친 절도범 5명을 구속했다. 장물업자 10명은 불구속 입건됐다. 이들은 자신들로부터 도난 문화재를 사간 사람들이 누군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자세히 진술해주는 대가로 선처를 받았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이 넘겨받은 문화재를 누가 사갔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경찰에 구속됐다. 법원은 김씨에게 2년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다른 장물업자 대부분은 벌금형을 받았다. 김씨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교도소행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김씨가 복역하는 동안 그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 관계자는 “문화재 관련 업계는 점조직 형태로 연결돼 있어 한 번 신뢰를 쌓으면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된다”며 “김씨는 자신에게 도난 문화재를 사간 사람들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김씨는 출소하자마자 경찰을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실토했다. 사라질 뻔했던 문화재 1200여 점도 국고로 환수됐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26일 김씨로부터 도난 문화재를 사들여 불법 유통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 등)로 골동품업자 구씨 등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 중에는 충남의 한 사립대 교수 김모(47)씨도 있었다. 고서 수집가인 김 교수는 2005년 지인의 소개로 김씨를 만나 1200여만원을 주고 900여 점의 고서를 사들였다. 경찰 조사 결과 김 교수는 “수집가라 유통할 염려가 없으니 ‘껌껌한 물건’(도난된 문화재)이라도 상관없다”며 도난 문화재를 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국내 문화재 전문 경매 사이트 대표 김모(55)씨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이번에 회수된 문화재 중 일부가 이 사이트를 통해 유통됐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벌이던 중 이들이 허가 없이 영업한 사실을 추가로 적발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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