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들의 이유있는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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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국립현대미술관 한 학예연구사는 "요즘 같아서는 큐레이터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게 슬프고 후회스럽다"고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얼핏 분노의 눈빛도 스치는 듯하다.

기실 그러하다. 지난달 29일 오후 한국큐레이터포럼(회장 나선화)은 '국립현대미술관 유순남씨의 사표 파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냈다. 강선학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등 국·공·사립미술관과 대학박물관에서 일하는 큐레이터 55명 이름으로 발표된 이 성명서는 강경한 어투로 "유순남씨 관련 인사조치(본지 8월 22일자 15면) 를 즉각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차제에 관료적 발상을 중단하고 미술관 직제를 문화기관에 걸맞게 학예연구실 전문직 중심으로… 전면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

문제는 비단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성명서는 두번째 관심의 초점을 '서울시립미술관 파행 운영'(본지 8월 8일자 12면)으로 돌리고 있다. 성명서는 "행정직과 전문직의 불합리한 직제에서 비롯된" 서울시립미술관 문제 역시 "유순남씨의 경우와 같은 전문직 사장(死藏)"을 초래할 수 있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민중 미술품을 기증받은 뒤 약속했던 상설 전시장 설치를 미루고 있다는 게 파행 운영의 겉모습이지만, 사실은 전문직 홀대의 문제가 깔려 있다는 것.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가 이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시립미술관에 정보공개를 요청했지만, 미술관 쪽은 "인적 사항과 감사자료는 공개할 수 없다"고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동광(숙명여대 겸임교수) 협회 총무는 "미술관을 움직이는 주체가 학예연구직임에도 불구하고 행정직 공무원들이 전문직의 영역에 칼질을 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단행동도 뒤따를 것이란 게 그의 얘기다. 이유있는 그들의 분노에 혹 복수만 남지 않을지 걱정이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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