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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1년]포탄 자국·탱크 잔해… 전쟁 상처 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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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해발 3천m. 인공위성을 통해 해발 고도와 현재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GPS 계기판에 3천이란 숫자가 나타났다.

이곳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탈레반과 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몰아내기 위해 한바탕 전투를 벌였던 아프가니스탄의 등뼈 힌두쿠시 산맥의 정상 부근 살랑 고원. 살랑은 파슈툰어로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차량 두대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 그나마 탈레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한 미군 전투기의 무수한 폭격 때문에 달표면으로 변해 있다.

9·11 테러 1년을 앞둔 아프가니스탄의 실상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달 27일부터 북부 국경도시 이몸소입에서 쿤두즈를 거쳐 카불까지 3백여㎞를 달렸다.

지난달 31일 밤 살랑 고원을 넘던 구 소련제 밴 '와직'은 결국 웅웅거리며 신음소리를 내다 엔진 과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타지키스탄계인 운전사 구르봉(45)은 "살다 살다 이런 길은 처음 봤다. 꼭 쥐가 파먹은 치즈 같다"고 투덜대며 엔진 뚜껑을 열어젖혔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입은 아프가니스탄의 상처는 도로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미국이 지원하는 북부동맹군과 탈레반의 격전이 벌어졌던 쿤두즈 외곽은 물론이고 카불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주변엔 지금도 탱크 잔해들이 흉물스럽게 널려 있다.

힌두쿠시 산맥 언저리에 있는 찬다롱 마을 옆에 차를 대자 악바르란 이름의 20대 청년이 나타나 지뢰를 밟아 잘려나간 오른쪽 다리를 보여주며 한푼을 구걸했다. 그 옆에선 또 다른 청년이 "루스(러시아)"라고 외치며 절단된 오른팔을 흔들어댔다. 동네 꼬마들은 맨손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하며 "루스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7일 미군의 폭격으로 시작된 탈레반과의 전쟁을 포함해 지난 23년간 쉼없이 계속된 외침과 내전의 역사는 주민들의 몸에 상처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를 이어 계속된 전쟁 탓에 도로와 관개시설은 철저히 파괴됐다. 유엔 조사에 따르면 전체 도로의 20%만이 제기능을 할 수 있다. 최근 3년간의 극심한 가뭄으로 강물은 말라붙었고, 농지는 모래 언덕으로 바뀌었으며, 산은 풀 한포기 없는 민둥산이 됐다. 눈으로 확인한 주민들의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전쟁 중 타지키스탄으로 피신했다가 귀환한 미라 글(43)은 지난 3월 이후 쿤두즈 주정부의 난민촌 소개(疏開) 명령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중부 샤망간 지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쿤두즈 외곽에서 천막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에 가봤자 탈레반이 집을 파괴해 기거할 곳이 없다"고 울먹였다. 갈 곳을 잃어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난민이 쿤두즈에서만 3천명을 헤아린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의 최윤섭(崔潤燮·52) 아프가니스탄 지부장은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주로 유엔 소속 비정부기구(NGO)단체들을 통해 식량 원조를 하고 있지만 구호물품의 90%가 각 지역 실력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불이 가까워지면서 사정은 1백80도로 달라졌다. 세계 각지에서 파견된 NGO만 2백여개가 활동하면서 호텔·관공서 등엔 외국인들이 북적댄다. 일본제 승용차와 택시들이 시내를 질주하고, 시내 한복판에서는 교통체증까지 빚어진다. 코카콜라는 어디서나 사마실 수 있고, 카불에서는 휴대전화도 가능하다.

카불의 여성들은 얼굴과 몸을 가렸던 부르카를 벗어버리고 대신 스카프를 매고 있다. 노키아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던 마리자(18)는 "전통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스카프를 매는데 부르카를 안써도 뭐라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불의 외형적 변화를 한꺼풀 벗겨보면 전후 아프가니스탄이 겪고 있는 온갖 문제가 드러난다. 시내 외곽엔 빠른 속도로 빈민촌이 늘어나고 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전쟁이 끝나고 6개월 만에 1백30만명의 난민이 귀환한 것으로 집계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구호물자와 원조가 집중되는 카불로 몰리고 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구걸을 하는 아동들의 수가 카불에서만 3만8천명에 이른다. 외국인들이 음료수를 마시고 빈병을 버리면 서로 차지하겠다고 아이들끼리 주먹다짐을 벌인다. 엘케 위쉬 카불지역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관계자는 "극빈층의 증가와 이로 인한 생활격차가 새로운 사회불안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또 다른 불안 요인은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정부의 한계다. 집권 반년이 돼 가는데도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각 지역 군벌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해 군벌간의 다툼이 재연될 경우 '제2의 탈레반'이 부활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카불에서 가장 높은 16층 건물을 설계·시공한 압둘 지푸르 모쉐니(60)는 "탈레반은 패주했고 오사마 빈 라덴은 사라졌지만, 경제는 결딴났고 지방은 여전히 군벌의 수중에 있다"고 개탄하면서 "암흑시절이 다시 올까 겁난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수비대장으로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로야지르가 의원이기도 한 압둘라우 이브라히미(42)는 "외국이 우리를 돕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고 걱정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프가니스탄 도처에서 불안감은 여전하다.

카불=강홍준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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