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8) 창공에서 던진 와이셔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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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총장은 순천 탈환 작전의 지휘권을 김상겸 대령의 후임으로 광주 5여단장에 오른 김백일 대령에게 맡겼는데, 대전에서 내려온 2여단장 원용덕 대령이 반발한 것이다. 실제 원 여단장은 자신 밑에 있던 2연대 1개 대대와 12연대 2개 대대 병력을 움직였는데, 지휘권은 엉뚱한 사람이 차지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였다.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울분을 털어놨다.

여수와 순천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간 지휘부의 원용덕 대령(왼쪽에서 셋째)이 기자들에게 작전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원 대령은 자신의 예하 3개 대대를 여수와 순천으로 파견해 반란을 진압했다. 오른쪽에 앉은 이는 송호성 작전사령관(준장)으로 보이지만 분명치 않다. [중앙포토]

그의 말이 맞았다. 채 총장은 그럼에도 군의관 출신인 원 대령 대신 전투 경험이 많은 김백일 여단장에게 임무를 맡긴 것이다. 나는 중재에 나섰다. 원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일단은 지시대로 해야 한다.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급하니 탈환 작전이 모두 끝난 뒤에 원 여단장이 통합 지휘할 수 있도록 상부에 요청하겠다”고 설득했다.

김백일 대령에게도 전화를 걸어 “서로 잘 협조해 수습하는 게 먼저”라고 부탁했다. 나는 중국어로 이들과 통화했다. 마침 원 대령과 김 대령, 그리고 나는 모두 만주 군관학교 출신이라 중국어를 구사했다. 순천까지 진입한 반란군에 의해 전화선이 감청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중국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짐 하우스만 대위는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서 “백선엽 국장과 김백일 대령의 통화를 듣고 있자니 가관이었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모두 중국말이었다”고 썼다. 그는 또 “백 국장의 중국어는 나중 6·25전쟁 중 중공군 포로를 직접 신문해 재빨리 적의 정보를 파악하는 데도 쓰였다. 어쨌든 그들의 중국어 통화는 아주 훌륭한 보안통화였다”고 술회했다.

진압군은 병력 배치를 끝내고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진척이 없었다. 진압군의 행동은 굼떠 보였다. 광주 사령부에서 작전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만, 답답할 정도로 공격 상황에 관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각급 부대의 지휘관들이 뭔가 눈치를 보는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란군의 기세를 보면서 상황을 저울질하는 것 아니냐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진압군이 순천에 진입하는 것을 보면서 반란군이 먼저 그곳을 빠져나간다면 성과는 기대 이하일 것이다. 현지에서 그들과 부딪쳐 반드시 승리함으로써 저들을 궤멸시켜야 하는데도 일선의 동향이 없었다.

나는 지프를 타고 광주 비행장으로 내달렸다.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L4 경비행기 한 대가 있었다. 장성환 중위(예비역 중장, 나중에 공군참모총장을 지냄)가 조종하는 비행기였다. 나는 “당장 순천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장 중위는 “기름이 적어 한번에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난색을 표했다. 나는 그럼에도 무조건 띄우라고 지시했다.

곧 순천 북방의 상공에 도달했다. 순천지검 청사가 보이더니 그 옆의 소학교, 이어 학구역 너른 들판에 전개하고 있는 진압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진압군은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다. 그때는 지상과 무전으로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인가 떨어뜨려 직접 신호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넥타이를 풀었다. 카키색 군용 넥타이에 만년필을 꺼내 ‘반란군이 도주할 수 있으니 빨리 공격하라’고 적어 비행기 창문 밖으로 던졌다. 바람을 타고 넥타이가 멀리 날아갔다. 황금색으로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가을 들녘의 논 위로 넥타이가 떨어졌다.

그러나 지상에 있던 진압군의 눈에는 넥타이가 잘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속이 타 들어가는 듯했다. L4 비행기가 다시 낮게 선회해 진압군 상공 위로 들어설 때였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와이셔츠를 벗었다. 메모지 한 장을 꺼내 급한 필체로 같은 내용의 문장을 적었다. 단추가 달린 와이셔츠 주머니를 열어 메모지를 접어서 넣고 단추를 다시 잠갔다. 그리고 급히 비행기 창밖으로 다시 던졌다.

바람을 타고 와이셔츠가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초조한 마음으로 나는 지상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와이셔츠를 집는 것 같은 모습이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왔지만 잘못 본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진압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를 주운 모양이었다. 우연하게도 그 와이셔츠는 지상에서 12연대 2개 대대를 이끌고 작전에 들어간 동생 백인엽 소령에게 전달됐다.

진압군이 박격포와 기관총을 순천 방향으로 사격하면서 밀기 시작했다. 순천 시내가 갑자기 부산해지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반란군 일부가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이대로 밀고 나간다면 순천 점령은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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