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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레슨실 ④ 성악 박인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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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달 중순 이곳에 제자 일곱이 모여 있었다. 박 교수는 2003년 서울대 음대를 정년퇴임하고 백석대로 자리를 옮겼다. 일곱 명 중에는 대학생과 유럽 오페라 무대의 주역도 있었다.

◆남을 보고 배우라=첫 순서는 대학 2학년 여학생이었다. 이탈리아 가곡을 부르던 학생에게 박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고음이 왜 그렇게 불안한 것 같아?” 학생이 조금 쭈뼛거렸다. “소리에 힘이 안 붙어요.” 답이 아니었다. “아니지, 그건 결과지. 원인을 말해봐.” 학생이 한참 생각한 후 다시 입을 뗐다. “음정이 떨어질까 봐 두려워 소리를 잡고 있었어요.” 스승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거야. 넌 항상 두려워해. 이제 알겠지, 노래는 정신력이 먼저야.”

지켜보던 이들이 ‘아’하는 감탄을 뱉었다. 높은 음에서 위축되는 건 한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 박 교수가 늘 여럿을 한데 모아놓고 가르치는 이유다. 레슨이 계속됐다.

박인수 교수는 질문으로 레슨을 이끈다. “왜 그렇게 불렀느냐”는 물음에 제자가 스스로 답하길 기다린다. “자기 마음을 알아야 좋은 노래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최승식 기자]

“그렇게 한 호흡으로만 노래하면 안돼. 기어를 바꿔봐. 여기 코 윗부분에서.” 노래가 또 한번 끊어졌다. ‘기어를 바꾸라’는 주문에 나머지 제자들도 작게 콧소리를 내며 따라 해보고 있었다. 레슨은 이처럼 한 사람의 노래와 여러 사람의 작은 목소리로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내 실패에서 배우라=피아노 옆에 선 다음 사람은 테너 신동원(37)씨였다. 그가 이날 부른 곡은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중 ‘그대의 찬 손’. 높은 음에 올라서자 소리가 모든 이의 귀를 찔렀다. 방이 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팽팽한 성량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 전 서울대에서 박 교수가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 붙여줬던 별명은 ‘파열 테너’다. 음이 조금만 올라가면 소리가 찢어졌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파열 테너’의 발성법을 아예 바꿔놨다. 자신의 한계를 넘는 소리에서 가볍게 발성을 놓아버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 안돼요. 자기 방식으로 해야 오페라 무대에서 세 시간 노래해도 죽기 전 날까지 청년 목소리로 할 수 있는 거죠.” 신씨는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내년에는 세계적 명문인 영국 로열 오페라에 데뷔한다.

박 교수는 자신의 실패를 학생을 개선시키는 밑거름으로 쓴다. “하루에 세 번 무대에 설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때가 있었어요.” 미국 줄리아드 음대를 거쳐 국내외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때였다. 1983년 귀국한 그는 90년 가수 이동원씨와 ‘향수’를 부르면서 대중스타로도 떠올랐다. 갑자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은 96년이다. “이후로 엉망으로 노래했어요. 무대는 많았고, 도중에 내려올 수가 없었던 거죠.”

그는 17~18세기 오페라 가수의 전성시대를 다룬 문헌을 파고들면서 여러 실험을 했다. 튼튼한 소리로 나이에 상관없이 노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5년이 걸렸다. “제자들의 노래에 테크닉을 더하고 소리를 키우는 것보다 빼고 지우는 방식을 가르치게 됐죠.” ‘박인수 창법’이라 불리는 방식이다.

“원래 노래 잘 하는 사람이 제자로 오는지, 아니면 제가 잘 가르치는지, 자주 의견이 갈리죠. 하지만 이건 분명해요. 적어도 옛날 방법만으로 가르치진 않는다는 겁니다.”

박 교수는 83년 이후 매년 20여명 의 제자를 세상에 내놨다. 이제 쉰이 넘은 제자들도,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일흔이 넘은 그를 찾아오고 있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박인수의 원포인트 레슨

예술은 결국 사람이다. 박 교수가 전하는 ‘노래의 정석’은 ‘인간의 조건’을 닮았다.

▶ 정직=목소리는 인간관계와 같다. 솔직해야 결과가 좋다.

▶ 경청= 남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라.

▶ 개성=기존 창법에 얽매이지 말고 독자적 방법을 연구하라.

▶ 통속= ‘뽕짝’으로 갈 용기를 가져라. 고상한 소리만 내서는 안 된다.

▶ 계획=자신의 소리가 나가는 길을 눈으로 보듯 상상하라.


박인수의 제자들
정호윤·김재형·박현재 … 안팎서 인정받는 실력

박인수씨는 제자들과 종종 한 무대에 선다. 공연 제목은 ‘박인수와 음악 친구들’이다. 다소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박인수 사단’의 쟁쟁한 소리가 한데 울리는 무대다. 2004년에는 제자 다섯과 함께 유럽 3개국 순회 연주도 열었다.

함께 노래하는 제자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극장 최초의 한국인 전속 가수 정호윤(33), 런던·파리·베를린에서 주연으로 노래하는 김재형(37)이 대표적이다. 서울대 음대 교수로 다양한 무대에서 활동하는 박현재(45), 런던과 시드니에서 ‘트럼펫 테너’라는 별칭을 얻은 신동원(37), 2007년 유엔의 날에 뉴욕 유엔본부에서 노래한 정의근(40) 등 실력파 성악가 대부분이 박씨의 제자다. ‘카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적 앨범을 내고 KBS 클래식FM에서 DJ를 맡은 정기열(29)도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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