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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늘아… 나도 달을 보면 겁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61면

'8월이 조금 더 길었으면…'.

김신애(65·여·경남 진해)씨는 이번 달 달력을 넘기기가 싫다.9월의 달력에는 추석 명절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명절이 오면 이땅의 며느리들은 집단적으로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곤 한다. 그러나 명절을 맞이하는 요즘 시어머니들의 속사정은 알고 보면 더 말이 아니다. 김씨는 연일 비가 내리는 날씨 때문에 속을 태우고 있다. 추석이 오기 전에 이불 빨래를 해야 하는데 해가 잘 들지 않아서다.

"어린 손자녀석도 올텐데 이불에서 늙은이 냄새 난다고 싫어할까봐 걱정이네요."

이불 빨래뿐이 아니다. 냉장고 청소도 명절 전에 으레 하는 일이다. 평소에 쓰지 않던 예쁜 접시·그릇도 다 꺼내 꼼꼼히 닦아놓는다. 지저분하게 해놓고 있으면 혹여나 며느리가 잘못 본받을까봐 신경이 쓰인다.

명절 직전이면 김씨는 더 바빠진다. 떡 지을 쌀도 미리 담가놓고 제사상에 올릴 재료들도 준비하기 때문이다. 서울 사는 아들 내외는 명절 전날 밤 늦게 도착해 명절 당일 상을 물리자마자 서울로 떠난다. 오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란다. 피곤해 하는 며느리에게 차마 일을 시킬 수 없어 명절 푸닥거리는 싫든 좋든 김씨의 독차지다.

이렇게 멀리 살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며느리들이 요령을 피우기는 마찬가지. 시댁이 경기도 양평인 서미란(31·여·서울 상계동)씨는 명절 전날 당직을 도맡아 한다. 명절 하루 전날 고생이 제일 심하기 때문에 꾀를 쓰는 것이다. 명절 당일 아침에 내려가는 일도 종종 있지만 시어머니는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나무랄 방법이 없다.

김은정(33·여·서울 구로동)씨는 결혼 초부터 '모르쇠'로 일관했다. 일을 배운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고 손을 내젓는데 시어머니가 같이 살지도 않는 며느리를 가르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일이라도 시킬라치면 아들이 "피곤한데 고생시킨다"며 엄마를 타박하기도 한다. 어렵사리 며느리에게 일을 시킨다고 해도 시어머니는 속이 터진다.

"부침개나 좀 뒤집으랬더니 몇 시간을 붙들고 있는지…. 그거라도 안시키면 버릇 잘못 들일까봐 겁나고, 두고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불이 나고…."

시어머니가 고생해 만든 음식을 자식들에게 싸줘도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듣기 힘들다. 나물이니 떡이니 냉장고에서 썩혀버릴 걸 왜 주냐며 마다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며느리들도 시어머니들이 고생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시'자(字)만 들어가도 뭐든지 스트레스라고 입을 모은다.

이귀남(58·서울 압구정동)씨는 명절 전날이면 웃돈을 줘서라도 파출부를 부른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식기세척기를 명절 치레를 위해 큰 맘 먹고 구입했다. 시댁에 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며느리들이 일이 많다고 싫어할까봐서다.

"요새는 김치를 담가줘도 택배로 보내라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오는 게 싫다는 거죠."

위로는 시어머니, 아래로는 며느리를 '모시고' 있는 '낀 시어머니'의 마음고생은 더하다.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시어머니를 따르자니 며느리 눈치가 보여서 죽을 맛이다.

자식이 있는 곳으로 역(逆)상경을 하는 시어머니라고 해서 명절 고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서영자(70·여·충북 충주)씨는 올해부터 아들집에서 명절을 지내기로 했다. 몸만 가면 편하련만 서씨는 벌써부터 반찬통을 하나씩 비우고 있다. 음식을 해다 나르려는 심산이다. '며느리가 뭘 할 줄 알겠냐'싶어서다.

시어머니들 사이에서는 "자식이 오면 반갑지만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이 농담 아닌 농담으로 오간다. 딸만 둬 명절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는 친구들은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다. 명절을 치르고 자식들이 떠난 뒤 남편이랑 부부싸움을 벌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명절 스트레스를 모르는 시아버지는 눈치 없이 자식들을 붙들어 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황영희(62·여·서울 청담동)씨는 몇년 전부터 명절 때마다 남편과 해외여행을 떠난다. 명절이면 며느리는 아이에게 매달려 있고 딸은 공주처럼 키워놔 일을 못시킨다. 손자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집을 어지럽혀 놓아도 자식들은 집을 치워놓고 갈 생각도 안한다.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쩨쩨하고 촌스러운 시어머니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차마 내색도 못한다. 명절만 치르고 나면 몸져 눕는 아내를 보다 못한 남편이 해외여행 티켓을 끊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박복남(52)씨는 명절 개혁을 통해 예비 시어머니가 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5대 조상의 제사도 챙기던 집안의 맏며느리인 그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윗대 제사를 정리했다. 명절은 동서네와 번갈아가며 주관한다. 제사 음식도 간소화했다. 남자들은 물론 아이들도 과일 깎기·신발 정리·휴지통 정리 등 집안일을 나눠 맡는다.

그는 "시대는 바뀌고 있는데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여자들이 너무 일에 치이면 조상에게 감사하고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명절의 본질을 잃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예비 시어머니 세대들이 명절문화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며느리가 들어오면 다시 가족회의를 해서 명절을 어떻게 지낼지 결정할 예정이다.

'부부클리닉 후'의 김병후 원장은 "시어머니가 고지식하면 고생을 피할 수 없다"고 충고한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안된다 싶으면 빨리 포기하거나 타협을 하는 게 낫다는 것. 그는 신·구 세대의 다양한 문화적인 코드가 공존하며 어우러지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부모 세대가 가이드라인을 정하되 자식 세대에 강요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정신건강에도 이롭습니다." 김원장의 권고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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