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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내각 넘버3, 남반구 출신에 무게 실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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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호 03면

반기문 사무총장이 내년 1월 유엔에 신설되는 ‘유엔 여성’의 초대 수장을 9월 임명한다. 미첼 바첼레트(1) 전 칠레 대통령과 메리 로빈슨(2) 전 아일랜드 대통령, 르완다의 루이스 무시키와보(3) 외무장관 등이 유엔 외교가에서 유력 후보로 꼽히고 있다. 유엔 내 ‘넘버 2’인 아샤로즈 미기로(4) 사무 부총장을 비롯해 강경화(5) 유엔고등인권부판무관, 헬렌 클라크(6) UNDP 총재, 노일린 헤이저(7) 아태경제사회이사회 사무총장 등 유엔 내 여성 파워도 커져가고 있다. [중앙포토]

남미의 전직 대통령일까, 아프리카의 외무장관일까, 아니면 제3의 인물일까. 미국 뉴욕의 유엔 외교가가 술렁이고 있다. 내년 1월 출범하는 여성 인권·권익 통합기구인 ‘유엔 여성(UN Women)’의 최초 수장에 누가 낙점될 것이냐를 두고서다. 유엔 소식을 전문으로 다루는 뉴욕의 인터넷 통신·신문들은 연간 예산 5억 달러(약 6100억원)인 세계 최고 권위 여성 조직의 키를 누가 잡을까를 연일 보도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여성기구 ‘유엔 여성’ 첫 수장 9월 발표

지난 2일 유엔 총회는 192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유엔 여성’ 설립 결의안을 채택했다. 전 세계 여성계·시민단체들은 “여성 권익 향상의 역사적 진전이다” “여성계의 수십 년 숙원이 해결됐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설립을 둘러싼 4년간의 줄다리기를 끝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여성 차별을 철폐하고 양성 평등을 증진하려는 유엔의 노력에 한층 힘을 실어 주는 결의”라며 역사성을 부여했다.

‘유엔 여성’은 유엔 내 여성 조직 4개, 즉 여성지위향상국(DAW·1946년 설립)과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국제연구훈련원(INSTRAW·76년 설립),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사무총장 특별 자문관실(OSAGI·97년 설립), 유엔 여성발전기금(UNIFEM·76년 설립)을 통폐합, 총괄 운영하게 된다.

각국 여성계가 환호한 이유는 단순히 조직을 통합해서가 아니다. 위상 강화다. 통합 조직 수장의 직급은 유엔 내 ‘넘버 3’인 사무차장(USG·Under Secretary General). 유엔아동기금(UNICEF)이나 유엔인구기금(UNFPA)·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등의 수장은 모두 사무차장급이지만 기존 4개 여성 조직의 수장은 국장급이었다.

사무차장급,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
국제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의 매리언 멀런은 “유엔 내 여성조직의 수장이 마침내 반기문 사무총장의 ‘내각’에 참여해 유엔의 최고위 정책 결정 과정에 관여할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에이즈 프리(AIDS Free)’의 폴라 도노번 사무총장은 “유네스코가 세계 어린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유엔 여성’은 세계 여성들의 삶을 개선할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유엔 내 변방 이슈로 취급돼 온 여성 문제가 국제사회 주류에 올라서게 됐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아이티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 피해가 심각하다는 보고가 있어도 지금까지는 이곳의 평화유지군 활동과 여성 인권 보호 활동이 긴밀히 연계되지 못했지만 앞으론 아이티 논의 테이블에서 여성 이슈를 유기적으로 엮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계에선 79년에 여성차별철폐협약 채택(CEDAW), 85년 나이로비 유엔세계여성대회, 95년 베이징 유엔세계여성대회 이후 여성 권익 신장사의 이정표를 긋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유엔 여성’의 최소 연간 소요 예산은 5억 달러다. 기존 4개 여성 조직 연간 총액의 두 배다.

‘유엔 여성’의 수장은 9월 반기문 사무총장이 임명한다. 2006년부터 유엔 여성 조직의 통합을 추진해 온 전 세계 300여 개 여성단체는 “외교력과 도덕성을 갖춘 스타급 여걸이 수장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까지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은 지난 3월 국내 지지율 84%의 인기 속에 퇴임한 미첼 바첼레트(59) 전 칠레 대통령이다. 바첼레트는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본인도 망명과 감옥 생활을 하며 독재에 항거한, 소아과 의사 출신이다. 미혼모로 자녀 둘을 키웠다는 점에서도 여성계의 주목을 받았다. 재임 기간 칠레의 경제력도 끌어올린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바첼레트 전 대통령을 선호한다는 얘기도 외교가에서 흘러나온다.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도 바첼레트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 유엔 출입기자 출신 원로 언론인 바버라 크로셋은 “카롤 벨라미, 사다코 아가타, 그로 할렘 브룬틀란 등 배짱 좋은 여성들을 포진시킨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에 비해 반 사무총장은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 여성들을 임명해 왔다”면서도 “반 총장이 바첼레트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은 박수 받을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바첼레트 전 대통령은 아직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사무국의 고위 외교 소식통은 22일 “현재까지 12개 나라가 지명 후보를 추천했지만 바첼레트 전 대통령은 신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엔 소식을 전하는 이너시티 프레스(ICP)는 “바첼레트 전 대통령이 유엔아동기금 사무총장 자리를 원했으나 미국의 앤서니 레이크에게 밀렸다”며 “경쟁 구도가 아니라면 해 보겠다는 마음이라는 얘기도 들린다”고 전했다.

고위 외교 소식통은 “되도록 여성, 그중 거물급 여성이 돼야 한다. 또 선진국 중심의 북반구 출신이 아닌, 개도국 또는 저개발국 중심의 남반구 국가 출신이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여성 이슈가 개도국 여성 중심이어서 남미·동남아시아·아프리카 등 개도국 출신의 수장이라야 이끌어 가기가 쉽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도 “서구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여성 권리 개념을 개도국에 밀어붙인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남반구 출신으로 하자는 게 대세”라고 보도했다. 칠레는 남미에 속해 있으면서도 최근 선진국 그룹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바첼레트 옹호자들은 “선진국과 개도국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꼽히는 인물이 르완다의 루이스 무시키와보(48) 외무장관이다. 86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후 2008년 르완다 정부의 대변인을 맡기까지 22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르완다 어린이기금’을 세워 르완다 청소년들을 도왔다. 무시키와보의 가족사는 바첼레트 전 대통령의 가족사 못지않다. 아프리카에서 만연한 민족 분쟁, 인종 청소의 대표적 희생자이다. 투치족인 무시키와보는 94년 후투족의 학살로 어머니와 3명의 남자 형제, 조카 등 12명을 잃었다. 솔로몬왕의 죄란 책을 내 르완다 학살을 고발하고, 르완다 국제형사 재판소(ICTR)의 학살자 처벌에 목소리를 높여 왔다.

스리랑카의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유엔 어린이와 무력분쟁’ 특별위원, 싱가포르 출신의 노일린 헤이저 유엔 아태경제사회이사회(ESCAP) 총재 등도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말레이시아·튀니지·노르웨이 등도 후보를 추천,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서구권이지만 메리 로빈슨 아일랜드 전 대통령도 여성계에서 선호하는 인물이다. 아일랜드 첫 여성 대통령으로 퇴임 후 유엔난민고등판무관 등 국제사회 일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외교 소식통은 “여론은 있지만 아직 본인이 등록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엔 내 고위직 여성 30%
‘유엔 여성’의 설립은 유엔 내 조금씩 커져 가는 여성 파워를 반영한다. 지난해 8월 현재 유엔 사무국 내 사무차장보급 이상 여성 비율은 전체 120명 가운데 27명으로 22.5%다. 반기문 사무총장 바로 아래 탄자니아 출신의 아샤로즈 미기로 사무 부총장이 있고, 그 아래 사무차장급에 노일린 헤이저 아태경제사회이사회 사무총장, 네버네섬 필레이 유엔 고등인권판무관(OHCHR) 등 10명이 있다. 사무차장보급 여성은 16명이다.

유엔 산하 전문기구 고위직 여성은 이보다는 많다. 44명 가운데 16명으로 36.4%다. 선임 사무차장급인 헬렌 클라크(전 뉴질랜드 총리) 유엔개발계획(UNDP) 총재를 비롯, 카렌 아부자이드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 사무총장 등 5명이 사무차장이다. 사무차장보는 11명. 선출직인 세계보건기구(WHO)의 마거릿 첸 사무총장과 이리나 보코바(전 불가리아 외무장관) 유네스코 사무총장도 사무차장급 이상의 고위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엔 본부에는 여성 대사들의 파워도 막강하다. 미국의 수전 라이스 대사와 이스라엘의 가브리엘라 샬레브 대사, 브라질의 마리아 비오티 대사, 룩셈부르크의 실리에 루카스, 에스토니아의 티이나 인텔만 대사 등 24개국 여성 대사들이 유엔 무대에서 뛰고 있다.

강경화 OHCHR 부판무관 맹활약
유엔 산하 50개 국제기구 사무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은 343명. 이 가운데 45%가 여성이다. 외교부 국제기구 국장을 지낸 강경화(55) 유엔 고등인권부판무관(사무차장보)은 유엔 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 여성 중 최고위직이다. 신혜수(60) 이화여대 겸임교수와 이양희(54) 성균관대 교수는 유엔 협약기구인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와 아동권리위원회에서 각각 위원과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기구 인턴 과정인 초급 전문가 과정(JPO)을 통한 진출도 늘고 있다. 정부는 96년 이후 매년 평균 5명씩 모두 68명을 국제기구에 파견해 현재 39명이 정식 직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JPO 1기인 전혜경씨가 국장급 아래 선임과장인 P5급으로 유니세프 뉴욕 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JPO 출신 가운데 6명이 과장급인 P5, P4급에 올랐다.

‘유엔 여성’ 출범을 계기로 한국 정부의 기대도 크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여성 인권과 지위 향상에 성공한 롤모델 국가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애리 여성가족부 국제협력관은 “한국은 83년부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평등교육진흥원 등 연구 인프라를 갖춰 왔다”며 “‘유엔 여성’의 연구개발(R&D) 연구소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위상에 걸맞은 기여. 우리 정부는 지난해까지 유엔 여성개발기금에 연간 1만 달러를 기여하다 올해 3만 달러를 냈다. 2009년 기준 1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나라는 11개국. 스페인이 2360만 달러, 노르웨이 1139만 달러, 영국 500만 달러, 미국 449만 달러, 스위스 321만 달러, 네덜란드가 301만 달러를 냈다. 손 협력관은 “기여금을 좀 더 올려 ‘유엔 여성’에서 한국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위상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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