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버지와 두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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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고 본다. 관객(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고통받는 사람에겐 위로를, 좌절한 사람에겐 용기를 주는 사회치료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 때로는 대치하고 반목하면서도 절묘한 협상과 화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극적인 반전의 묘미도 있어야 한다. 또 관객에게 나름대로 전하는 뭔가의 메시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엔 그 어떤 요소도 없다. 음모와 배신, 처절한 보복, 번뜩이는 칼날밖에 보이지 않는다. 두 차례 청문회 과정, 신당을 둘러싼 이합집산, 병풍공방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대치극 속에는 서로를 죽이겠다는 음습한 살인극밖에 없다. 어떤 협상, 어떤 화합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희망,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는 저질 폭력극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3金시대를 마감하고 새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과도기적 파행 현상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또는 정치란 원래 정권 쟁취가 일차적 목적이니 대선 쟁취를 위한 제로섬 싸움은 자연스런 것이라고도 한다. 과연 그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모든 정치 파국은 두 아버지 정치 지도자와 두 아들의 함수관계에서 출발한다고 단순화해 볼 수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치는 뚝 끊고 국정만 살핀다 했지만, DJ는 여전히 한국 정치 한 축을 좌우할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 지도자의 두 아들이 지금 감옥에 있다. 워낙 우리는 건망증이 많아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하나도 아닌 두 아들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은 보통 아버지로선 견딜 수 없는 고통이고 대통령으로선 참을 수 없는 수모이기도 하다. 두 아들의 비리는 아버지의 노벨상 영예를 짓밟았고 그의 모든 정치 업적도 무효화했다. 뿐더러 당의 정권 재창출의 희망도 사라지게 했다. 보통 아버지의 아픔에 더해 정치 지도자로서 희망을 모두 앗아갔다.

그 고통과 한을 일반인들로선 짐작키 어렵다. YS의 아들이 감옥에 갔을 때였다. YS의 비서실장이었다가 당시 당 사무총장을 했던 P씨에게 YS가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P씨는 너무나 황당했다. 평소 대통령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막말로 역정을 부렸다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 아들을 감옥에 넣는다는 것은 국가를 위해 재고할 일이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합리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위험이 크다는 뜻에서다. 그 후 IMF체제가 왔고 정부의 대처는 뒤죽박죽이었다. 아무리 DJ가 뛰어난 지도자고 보통 수준을 뛰어넘는 강인한 지도력이 있다 한들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오늘의 정치 파국을 몰고 오는 오기와 '눈에는 눈'식 대결국면이 지도자의 의사가 아니라 한들 참모와 주변의 권유로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아버지 정치지도자가 이회창 후보다. 하나도 아닌 두 아들의 병무 비리 의혹으로 한번은 낙선을, 이제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정계은퇴를 선언한 벼랑 끝에 몰렸다. 떼놓은 당상으로 여겼던 대통령 자리가 병풍으로 하루 아침에 날아갔다. 5년간 와신상담, 이제 다시 기회가 왔건만 똑같은 사안을 두고 똑같은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의 지지율은 불안하다. 이럴수가 ! 검찰의 엄정 수사를 촉구하지만 법무장관이 바뀌면서 의혹을 기정사실로 바꿀 검찰인사로 지목했던 인물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물론 한쪽 아들은 수감중이고 다른쪽은 의혹수준이라는 차이는 있다. 그러나 분노와 오기가 치솟기는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총리 인준은 당론 반대고 법무장관 해임안은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살벌한 정국으로 치닫는 것이다.

두 정치 지도자의 오기싸움, 아니 두 아버지의 두 아들 투옥과 비리 의혹에서 번지는 이 살벌한 정치 싸움이 원초적 본능에서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싸움이라 치자. 그렇다면 국민은 무엇인가. 두 아버지의 피나는 오기 싸움에 정치는 난장판 되고 나라는 깨져도 좋단 말인가.

이래선 안된다. 다른 영약이 필요 없다. 두 지도자가 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대통령 부(府)는 정말 정치 뚝하고 순리에 따라 임기 말을 조용히 넘기는게 상책이다. 검찰이 병역비리를 제대로 조사하게끔 공정인사를 해주고 그 답을 기다리게 해줘야 한다. 李후보도 이 난장판 정치를 협상과 화해로 이끌고 갈 관용을 보여야 한다. 그의 지지율이 제자리 걸음인 것은 관용의 미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문제 때문에 나라 정치를 개판으로 만들었다는 정치 지도자로 후세에 기록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두 지도자는 각고의 인내와 관용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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