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대 명당'은 절대 없다: 쥐를 잡는 데는 소보다 고양이가 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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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너무나 당연한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다르다.

거짓이 몸에 밴 사람의 말이라면 성현의 말씀을 읊조려도 감동이 없고 군자의 풍도가 있는 인물의 말이라면 하찮더라도 귀하게 들린다.

쥐를 잡는데 소를 쓰는 바보는 없다. 이런 당연한 도리가 요즘은 잘 통하지 않는다. 무조건 크고 비싸고 좋은 것을 선호한다. 한마디로 바보짓이다. 그러면서도 바보인 줄도 모른다.

공자가 제자 자하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지만 물고기가 없다고 해서 물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군왕은 백성을 잃으면 자신이 죽는 것이지만 백성은 군왕이 죽어도 그대로 백성인 것이다."

명당은 땅을 살피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기 때문에 때로는 소같은 명당이 필요한가 하면 때로는 고양이같은 명당이 적절할 때도 있다.

명당은 그곳에 누가 터를 잡았다고 그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명당으로 있을 뿐이다.

호화분묘를 보다 보면 자꾸 전국시대 시교가 한 소와 쥐 설화가 생각난다.

고양이면 충분할 것을 소를 들이대는 꼴이니 쥐도 못잡을 뿐 아니라 아까운 소만 허송세월하게 만드는 격이 아닌가. 세상의 부귀영화는 뜬구름 같다고들 한다. 그 호화분묘가 백년 갈지 천년 갈지 누가 알겠는가.

진시황의 능처럼 혹 천년을 간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이미 시신은 진토가 되었을 것이고 후손마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터인데.

더욱 문제인 것은 이런 현상을 경제력이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까지 좇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한 손에는 깡통, 다른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든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앞으로 현대 도시에서의 명당이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견해를 밝힐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분수에 맞는 터잡기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다 좋은 명당이란 것은 없다. 나는 산골을 좋아하지만 내 처나 자식들은 서울을 더 좋아한다. 내게 명당이 다른 사람의 명당일 수는 없다. 그래서 풍수는 객관화나 계량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돈이 거기 있으니까 은행을 턴다"고 한 윌리 서튼의 노랫말이나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는 조지 멀로리의 명언은 엄격한 격조의 차이가 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표현이 아닐까?

만약 돈이 명당의 조건이라면 우리나라 최대의 명당은 한국은행이다. 돈은 기본적으로 더러운 것이다. 명당은 깨끗하고 밝은 것이다.

연꽃이 진흙탕 물에서 피어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뿌리 중 한줄기는 반드시 맑은 생명수에 이어져야 한다.

소와 고양이의 쓰임새를 알고, 명당이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자각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많이 깨끗해 질 수도 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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