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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19. 무시당한 제작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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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1989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강수연씨와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필자, 임권택 감독, 강씨, 김동호 영화진흥공사 사장(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내가 처음 나가 본 국제영화제는 1989년 7월 열린 모스크바 영화제였다.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던 것이다. 그땐 지금과 달리 국제영화제에 관심있는 영화 제작자가 거의 없었다. 항공료와 체류비가 아까워서라도 감독이나 배우를 보내고 끝낼 뿐이었다.

하지만 한국영화가 더 성장하려면 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나는 초청을 받고 감독.배우는 물론 몇몇 기자와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쓴맛을 봐야 했다. 태흥영화사로선 첫 출품이라 인사라도 하려고 영화제 집행위원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그런데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며 모두 불참한 것이다. 결국 우리끼리 식사를 마쳤다. 예약한 음식이 남고 돈은 돈대로 썼다.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

다음날 또 불쾌한 일을 당했다. 이번엔 우리 내부 문제였다. 영화제 사무실 앞을 지나는데 '아제아제…'의 팸플릿이 눈에 띄었다. 앞면은 영어, 뒷면은 러시아어였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태흥'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꼼꼼히 살펴보니 제작사가 영화진흥공사(영진공)로 돼 있었다. 당시엔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으면 영진공이 대소사를 거의 다 챙겨주었다. 자막을 넣고 프린트를 보내고 영화제와 연락을 취하는 것까지-. 그렇다고 영진공을 제작사로 이름을 올려서는 안 되는 법 아닌가. 또 무시당했다는 느낌에 내내 마음이 언짢았다.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타 다소 위안이 됐지만 한번 생긴 앙금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영화제가 끝난 뒤 우리는 고려인이 많이 모여 사는 타슈켄트로 날아가서 '아제아제…'를 상영했다. 한복을 차려 입은 한 핏줄들이 머나먼 타향에서 우리 영화를 보며 눈물 짓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시사회를 마치자 고려인들이 근처 식당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천장이 높은 식당은 삐죽삐죽 솟은 수석으로 꾸민 현관 중앙의 연못으로 인해 운치가 있었다.

우리는 난간이 낮게 쳐진 2층 방으로 안내됐다. 식사 전에 보드카가 돌았다. 독한 술이 몇 순배 돌자 며칠간 눌러뒀던 앙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큰 술잔에 보드카를 가득 부어 '원샷'을 했다. 단숨에 취기가 올랐다. 나는 긴 식탁의 대각선 끝에 앉아있던 김동호 영진공 사장을 향해 팸플릿을 흔들며 투덜댔다. "그래, '아제아제…'가 작품상을 받았으면 당신이 시상대에 올라갈 생각이었나 보지? 제작자는 난데, 공사 사장이 왜 올라가? 당신이 돈을 대고, 당신이 제작했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주변에서 말렸지만 나는 이미 발동이 걸린 상태였다. 화가 치밀어오른 나는 술병을 거머쥐고 일어섰다. 그 병으로 김 사장을 내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어 걸음 떼자마자 술기운이 확 오르면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난간을 무너뜨리고 눈앞으로 연못이 다가오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눈을 뜨니 호텔방이었다. 37시간이나 내리 잤다고 했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몇 ㎝만 옆에 쓰러졌어도 뾰족한 수석에 등을 찔렸을 거라는 얘기였다. 아찔했다. 가벼운 찰과상만 입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귀국한 뒤 김 사장은 "직원의 실수였다"며 용서를 구했지만 토라진 마음이 돌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름대로 제작자로서 열정을 갖고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에 크게 서운했던 것이다. 이제는 다 흘러간 얘기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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