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지역'의 남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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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느 기업의 사원 모집 때 e-메일로 제출된 서류의 주소란에 '특정지역'이라고만 적은 사람이 있었다. 담당자는 회사와의 첫 대면이라 할 수 있는 원서에까지 이런 장난을 하는 사람은 거들떠볼 필요조차 없다 생각하고 다음 차례로 넘어가려다 잠시 멈췄다. 지원자의 첨부 서류를 검토한 결과 대학 성적도 우수하고 취미도 다양해 꽤 쓸모가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담당자의 전화를 받은 신청자는 '특정지역' 출신이어도 괜찮은가를 확인하고서야 정확한 주소지를 대더라는 것이다.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인사 담당자에 따르면 문제의 신청자는 언론에서 숱하게 거론되고 있는 '특정지역' 문제에 매우 예민해진, 아주 소심한 젊은이였다. 이런 저런 모임에서 빠짐없이 튀어나오는 대선이나 병풍(兵風), 그리고 이와 관련된 검찰 수사 이야기에 이르면 역시 '특정지역'에 얽힌 화제가 적나라하게 거론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무심코 넘어갔던 '특정지역'이라는 단어가 어느 사이 특정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의식과 함께 섭섭함을 던져주고 있다.

우려의 초점은 '특정지역'이 곧 호남을 가리키고 그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계속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인사정책과 각종 비리의 줄기가 계속 특정지역으로 연결, 부각돼 같은 지역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불특정 다수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염려도 없지 않다. 한나라당과 민주당과의 정쟁 대상이 된 '특정지역 인물들'의 범위가 중앙 및 지방 관계에까지 확대되고 비판·비방의 대상으로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정권에서 일어난 숱한 부정 비리와 인사정책상 문제를 이유로 영남을 '특정지역'으로 깊이 연결시켜 도마에 올린 빈도는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 거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 시대에 그 단어는 부정적 의미가 쌓이기 전에 없어졌거나 사그라져 버렸다. 시대의 변화이며 권력 및 정치적 기반과 관련된 상황의 함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격차다.

지역적으로 고립된 민통선 북방마을은 '특정지역'으로서 인류 사회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돼 왔다. 이 마을을 가리키는 '특정지역'이라는 단어에는 차별적 의미나 부정적 이미지가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전장에서 대포 쏘듯 내보내는 성명전과 주요 정치인의 거친 발언에 나타난 '특정지역'은 말 그대로 특정한 지역인들에게 감정적이고 부정적인 여운을 계속 흘리고 있다. 꼭 보도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이슈라면 '특정지역'이란 두루뭉술한 표현보다 구체적인 적시를 해 다수의 이미지 손상을 막아야 한다.

로마시대의 변론관들은 상대방을 자가당착에 빠뜨리고 무력화하기 위해 오늘날 과와수업하듯 수사학과 논리학 공부에 매달렸다. 말만 잘 꾸미면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상대편에게 상처를 주는 '견고한 칼'들이 어느날 자신들에게 되돌아와 신경파열 증세로 시달리는 일들이 많았다.

'특정지역'을 거론할 때 행여 관련된 인물 이외의 인사들까지 확대시켜 거론하지 않았는지, 또 그런 유의 의식이 묻어 있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특정지역'은 확실히 김대중 정부가 잉태한 문제이며 정쟁의 산물이다. 각종 비리 수사와 함께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나타난 반DJ정서와 맞물려 호남 사람들에겐 영 찜찜한 느낌을 주는 단어다. 이런 시기에 정치권과 언론이 '특정지역'을 남용·오용하게 되면 비판의 대상은 더욱 흐릿해지고 불특정 다수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된다. 말을 할 때도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 머리 속에서 자기검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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