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 모델 영 헷갈리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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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주부 金모(38·서울 상계동)씨는 최근 세탁기를 새로 장만하려다 포기했다. 金씨는 먼저 대형 가전회사 직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모델 두세 개를 고른 뒤 좀 싸게 살 요량으로 할인점·양판점을 돌며 해당 모델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포마다 모델이 같지 않았다. 한 양판점에서는 "대리점에서 파는 제품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매 관계라는 제품을 보여줬지만 재질이 약해 보이고 디자인이 좋지 않아 구입하지 않았다.

지난달 홈쇼핑에서 대기업 브랜드의 김치냉장고를 구입한 주부 李모(39·서울 반포동)씨는 인근 대리점에 들렀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상품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어 대리점 주인에게 모델명을 얘기했더니 "홈쇼핑에서 싸게 팔기 위해 일부 부품과 기능을 빼고 중소기업에 위탁생산한 모델이어서 대리점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李씨는 집에 돌아와 김치냉장고의 제조원이 T전자로 표시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가전회사들의 제품 및 가격정책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 웬만한 알뜰 소비자들도 두손을 들게 마련이다. 같은 회사 같은 상표의 제품이라도 대리점·할인점·양판점·홈쇼핑 등 유통 점포별로 모델명이 다르고 가격도 제각각이다. 제품의 기능을 비교하기도 쉽지 않아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다.

◇헷갈리는 제품군=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양문 여닫이 냉장고도 자세히 보면 유통점마다 파는 제품이 다르다. 지펠의 흰색 5백67ℓ급으로 작은 LCD창이 달린 제품만 하더라도 백화점에서는 575DU, 양판점에서는 5백75LC 모델이 팔린다.

점포별로 아예 용량도 다르다. 지펠의 6백ℓ급 양문 냉장고의 경우 백화점·대리점·양판점에서는 6백84ℓ급이 주종인 반면 할인점에선 6백73ℓ짜리가 주력이다.

LG전자 김치냉장고 중 1백30~1백60ℓ급인 132TD·141TS·162AD 모델은 홈쇼핑이나 할인점에서만 살 수 있고, 백화점이나 대리점에서는 구경할 수 없다.

일부 기능을 빼 가격을 낮춘 제품도 있다. 몇몇 홈쇼핑에서 60만원대에 판매해 인기를 모은 삼성전자 다맛 1백52ℓ들이 김치냉장고(1553BS)는 중소기업이 만들어 납품한 것이다. 냉동 기능과 쿨링커버 기능을 없애고 가격을 낮췄다.

최근 한 회사가 에어컨를 사는 고객에게 끼워준 71ℓ급 김치냉장고(A0755A)도 시중에서는 판매되지 않는다. 사은품용으로만 제작한 것이다.

소비자가 어떤 기능이 어떻게 다른 지를 구분하기는 더욱 어렵다.

한 업계 관계자는 "관련 업체에 종사하는 전문가도 제품별로 모델이 몇개나 되는지 정확히 모를 정도"라며 "10㎏ 세탁기만 하더라도 모델이 30~40여종에 이른다"고 말했다.

◇왜 다른가=제조업체들은 유통점별로 ▶백화점·대리점용▶양판점용▶할인점·홈쇼핑용 등 크게 세 부류로 나눠 공급한다. 일부 품목의 경우 하이마트용·전자랜드용 등 유통업체별로 세분해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가 가격을 비교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양판점·할인점은 유통 마진을 줄여 싸게 팔려고 하고, 제조업체는 대리점 눈치를 보느라 가격을 무턱대고 내릴 수 없는 입장이어서 제품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있다.

한 가전업체 관계자는 "할인점·양판점·홈쇼핑에서 판매되는 물량보다 대리점·백화점에서 팔리는 비중이 2~3배 이상 많다"며 "대리점·백화점에 공급하는 제품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말했다.

한 가전업체 관계자는 "싸게 팔릴 물건은 일부 기능과 부품을 빼고, 외장과 디자인도 그에 맞춰 수준을 낮추는 등 값에 따라 물건을 만들고 있다"며 "가전제품은 비싼 만큼 제값을 할 정도로 가격이 정직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반면 이마트의 이영수 가전팀장은 "디자인과 외장재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능이나 애프터서비스에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제품 정보 부족이 문제=상품은 다양하지만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제품 정보는 태부족이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는 기능이 비슷하면 회사가 달라도 모델번호의 첫 부분이 비슷해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며 "요즘에는 모델번호도 헷갈리게 되어 있어 대응상품을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할인점 등에서 상품설명서를 보여주지 않는 곳도 많다.

이마트 매장의 한 관계자는 "회사의 지침에 따라 제품 설명서를 고객에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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