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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학비평집 펴낸 황 현 산 고려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문학비평의 위기가 운위되는 요즘 중견 비평가 황현산(57·고려대 교수)교수의 첫 비평집 『말과 시간의 깊이』(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이미 여러 작품의 해설을 통해 비평 언어를 섬세하게 다루는 것으로 이름난 황씨는 "비평이 앞장서서 끌고 나가는 문학은 좋은 문학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오늘날 비평과 문학작품의 관계를 진단한다.

북한산이 올려다 보이는 서울 방학동 자택에서 20일 황씨를 만나 비평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간의 활동에 비해 첫 비평집이 많이 늦었습니다.

"출판사와 계약한 게 1993년이니 그렇네요. 제가 모든 게 다 늦어요. 늦은 밤에 일하는 습관 때문일까요. 정교해도 업무량은 떨어지죠. 고르고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땀내 나는 글은 어김없이 순결하다'고 했습니다. 비평에서 작품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데요.

"속 깊은 글은 세상에 대한 통찰과 아량을 같이 갖고 있어야 합니다. 문학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느냐 보다 마음 속 얼마만큼의 깊이에서 나온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신경림과 이성복의 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지만 시가 좋을 때 그 근원은 같습니다. 그걸 살펴보고 드러내는 게 비평이지요."

-그런데 왜 비평의 위기가 거론됩니까.

"비평이 주도적인 역할을 잃게 된 시대 분위기가 있습니다. 군사독재와 싸울 때 지식사회의 목표는 확실했죠.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담론의 위치를 정해줄 때는 차라리 편했겠지요. 그러나 이제 '문학은 이래야 한다'고 말하기 힘들어요. 이게 큰 이유라면 작은 이유는 일부 비평의 타락, 상업주의와의 결탁입니다. 문학 권력은 대단한 것은 아니나 그 형성의 이면에는 자기 기준에 대한 신뢰가 없는 열등감의 문학이 자리합니다."

-비평의 타락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주례사 비평을 비판하는 쪽의 문제의식은 맞지만 현실 인식에 과장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이 비판하는 황종연씨의 경우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뽐내려고 비평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밀한 문학성에 의지하는 정과리씨를 '문학 권력'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문학판을 개선하기 위해선 작가는 좋은 작품, 비평가는 좋은 비평을 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고발과 책임추궁이 아니라 반성을 앞세워야지요. 문학한다는 것은 곧 반성한다는 것입니다."

-문학과지성의 문학관을 형성한 비평가 고(故) 김현을 따르면서도 그와 다른 편에 있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발행하는 『내일을 여는 작가』의 편집 주간으로 계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미학주의자라고 해도 반대는 안해요. 그러나 미학을 삶의 곁가지나 장식으로 생각하면 분개합니다. 미(美)도 밥먹고 남녀가 자는 것만큼 본질적이에요. 가장 아름다운 건 사실 속에, 특히 고통 속에 있어요. 나의 미학은 작가회의가 폭압적인 정치 현실 아래에서 고통을 겪었던 일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봅니다."

-90년대 이후 시는 아무래도 문단의 '음모론'에서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좀 역설적이지만 시는 대중들에게 멀어지면서 본래 제 길을 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 들어 괜찮은 시인, 예컨대 아줌마 시인으로 출발했거나 대접받지 못하고 등장했던 사람들이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뒀거든요. 그 사람들은 대단한 성공을 바라지 않았기에 오히려 일정 수준에 다다른 것 아닐까요. 앞으로도 페미니즘 시의 강세는 계속될 겁니다. 창비나 문지에서 나오지 않은 시집 중에도 아주 뛰어난 시집이 많아요. 무명 출판사에서 나왔다고 반응을 못받을 때 제일 안타깝습니다. 저라도 해야되는데…."

그의 비평에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려는 비평가의 일반적인 의지, 즉 '문학 노동자'의 포즈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개인의 삶과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함께 녹여 작품의 두께를 더하는 작가에게 신뢰와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문학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 시점으로 안간힘을 다해 끌어들이는 행위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글=우상균,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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