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대 자살"아들 의문사 18년 싸워'타살'밝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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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회의실.허영춘(許永春·62·사진)씨는 1984년 군 복무 도중 숨진 장남 원근(당시 22세)씨가 타살된 것이라는 발표가 나오는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의문사규명위는 군 부대에서 자살한 것으로 발표된 원근씨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그가 타살됐고, 당시 군 간부들이 나서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의문사규명위는 "84년 4월 2일 새벽 강원도 화천군 육군 모 부대 소속이던 원근(당시 일병)씨가 중대본부에서 열린 술자리에서 뒷바라지를 하던 중 술에 취한 하사관(현 부사관)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오른쪽 가슴을 맞아 숨진 것으로 파악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공소시효(살인 15년)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의문사규명위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데는 전남 진도의 촌로인 아버지 許씨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뒷받침됐다.

원근씨는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2년을 마친 83년 9월 "3년 후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며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許씨는 아들이 중대장의 가혹행위에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는 믿어지지 않는 소식을 군 당국에서 전해들었다.

군 부대를 찾아간 許씨는 '원근이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왼쪽 가슴·오른쪽 가슴·머리 등에 모두 세 발이나 총을 쐈다는 군 당국의 설명이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건 직후 許씨는 생계에서 손을 놓다시피 하고 청와대·국방부 등 각계에 진정서를 내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 때마다 군 당국은 자살로 결론냈고 "백번·천번 탄원해도 소용없다. 몸조심하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許씨는 88년 기독교회관에서 4백여일간 단식농성하며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지만 법의학 책을 읽으면서 자살이라는 군 검찰의 주장에 맞서기도 했다.

"'동일한 시간에 총을 쐈다면 모든 상처의 피 색깔이 똑같아야 하는데 왼쪽 가슴 상처와 나머지 상처의 피 색깔이 다르다'고 들이대니 군 당국자가 대답을 못하더군요."

결국 許씨의 진정을 접수한 의문사규명위는 당시 목격자들에게서 "중대 간부들이 대책을 논의한 뒤 현장을 물청소하라고 지시했고,일부 부대원이 許일병의 시신을 창고로 옮긴 뒤 왼쪽 가슴과 머리에 추가로 총으로 쏴 자살로 위장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許씨가 원하는 것은 처벌이나 배상이 아니라 진실이다.그는 규명위의 조사 결과가 나온 후 아들을 총으로 쏜 것으로 지목된 하사관에게 "처음에는 복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용서한다.다만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고백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許씨는 "나라를 위해 군에 입대했는데 이렇게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다면 누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려고 하겠느냐"며 "원근이와 같은 희생자가 더 이상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철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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