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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현실 충격적 … 건국세대 뜻 되새겨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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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해방 직후 ‘사상 검사’로 이념 전쟁을 벌였던 선우종원 변호사가 사무실 서가 앞에서 최근 출간한 회고록을 펴들고 영욕의 한국 현대사에 관해 말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1946년 서울지검 정보부(현재의 공안부) 검사, 51년 장면 총리 비서실장, 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일본 망명, 60년 4.19 뒤 귀국해 조폐공사 사장, 61년 5.16 직후 반혁명 사건으로 2년3개월 간 투옥, 71년 국회 사무총장….

‘파란만장’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걸까. 선우종원(92) 변호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과 정·재계 거인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그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인 남정옥 박사와 다섯 달 동안 문답을 이어간 끝에 최근 회고록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펴냈다. 90대의 노(老) 변호사는 2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인정하고 안보 의식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꼿꼿이 앉아 ‘우국(憂國)’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젊은 시절의 결기가 느껴졌다. 서울대·명지대 총장을 지낸 선우중호(70) 광주과학기술원 총장이 그의 차남이다. 다음은 선우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회고록을 쓴 계기는.

“굴곡은 많았지만 후회 없는 나의 삶이 젊은 세대에게 교훈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올해 초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76년 11월부터 64회에 걸쳐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연재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러다 지난 3월 말부터 회고록 집필에 더 집중하게 됐다. 당시 발생한 천안함 사건을 지켜보며 우리의 안보 현실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안보 현실이라면.

“정부를 불신하고 국익에 반하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해방 직후의 이념 갈등이 연상될 정도다. 60년 전에 전쟁의 참화를 겪은 나라가 맞는지 믿기지 않는다.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며 대한민국을 건국한 선배 세대들의 뜻을 되새겨야 할 때다.”

-해방 뒤 ‘사상 검사’를 했는데.

“경성제대 졸업과 고등문관시험 사법과(현재의 사법시험) 합격 뒤 평양에서 해방을 맞았다. 소련군의 약탈과 만행을 접하고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됐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뒤 ‘공산당 뿌리뽑는 검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오제도(2001년 작고) 검사 등과 함께 남로당 지하조직을 분쇄했다.”

-당시 어려웠던 점은.

“백지 상태에서 입당 여부를 일일이 확인해 조직을 파악해나갔다. 오로지 사명감 하나로 버텼다. 그런 노력으로 남한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던 공산세력을 6.25전쟁 이전에 대부분 제거함으로써 박헌영이 말한 ‘거대한 공산혁명’을 막을 수 있었다.”

-신변에 위협은 없었나.

“50년 1월 집 앞에서 나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뒤늦게 발각됐다. 당시 우연히 일본 출장 일정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모면할 수 있었다. 6.25 발발 뒤 피난길에 올랐을 땐 ‘인민의 원쑤 오제도, 선우종원’를 잡아오면 당시로선 엄청난 거금인 200만원의 현상금을 준다는 벽보가 붙었다.”

-국회 사무총장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립을 주도했는데.

“5.16 직후 반혁명 사건으로 감방 생활을 하고 나왔는데 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부하들 말만 믿고 오판을 했다’며 사과했다. 윗사람이 그렇게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뒤 박 대통령이 ‘경제 발전을 이룬 후엔 반드시 민주주의를 하겠다. 동양 최대의 의사당을 세워달라’고 요청해 사무총장을 맡았다. 5년간 심혈을 기울여 지은 의사당이 지금도 국회의원들의 싸움터가 되고 있는 게 안타깝다.”

글=권석천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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