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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자랑하는 奇談의 보물창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상상력은 창조력의 기반이며 모든 문화활동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우리 문학에서 상상력은 진작부터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전제로 불구(具)라 할 만큼 편협하게 정의되고 적용되었다. 고지식한 사실주의가 다시 어정쩡한 근대문학론의 계몽성과 결합하여 환상이나 기상(奇想), 우의(寓意)를 폄하하고 무시한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근년 『해리 포터』가 전 세계를 휩쓸고, 고전의 품위를 획득한 『반지의 제왕』이 뒤늦게 우리 독서계를 압도해오자 이번에는 엉뚱하게 우리 문학 또는 작가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나무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환상소설의 전통이 빈약함을 한탄했다.

하지만 우리 전통에 대한 한탄만은 아무래도 지나친 듯 싶다. 『금오신화』나 몽자류(夢字流) 한문소설들뿐만 아니라, 우리 국문소설에서도 오늘날의 환상소설에 해당되는 전통의 축적은 결코 빈약하지 않다. 거기다가 그들의 전범이 되는 중국의 지괴(志怪)나 지이(志異)에 이르면 오히려 우리의 전통 축적은 그 어느 나라보다 풍부한 편이다.

이번에 완역된 『요재지이(聊齋志異)』는 비록 이 땅의 저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풍부한 그 방면의 전통을 증명해주는 책이다. 『요재지이』에는 청나라 초기의 문인인 포송령(蒲松齡)이 20대부터 70대까지 수십 년에 걸쳐 수집한 5백 편 가까운 민간설화가 그의 유려한 문장으로 엮어져 있다. 내용은 흔히 괴기(怪奇), 염정(艶情), 해학(諧謔)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실은 환상과 기상(奇想)으로 저자가 살았던 시대를 특이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편이 옳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대(明代) 4대 기서(奇書)에다 『유림외사(儒林外史)』『금고기관(今古奇觀)』 『홍루몽(紅樓夢)』, 그리고 이 『요재지이』를 더하여 중국의 8대 기서라고 한다. 그런데 그 8대기서는 끝내 자신의 시절을 만나지 못한 독서인(遇書生)들에게 힘입은 바 컸다. 그 중에서도 요재지이의 저자인 포송령의 삶은 더듬어보기에도 처연할 정도이다.

포송령은 과거(科擧)에 실패하여 장사꾼이 된 독서인의 아들로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었다. 열 아홉 살 때 치른 동자시(童子試)에서는 세 번이나 수석을 하였으나, 정작 과거의 관문이 되는 향시(鄕試)에서는 번번이 실패하여, 서른을 넘기고 나서는 훈장노릇으로 연명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떤 세도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30년이나 머물렀다가, 나이 일흔에야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수재(秀才)로 추천되었으니 그 불우함을 알 만하다.

하지만 포송령의 그같은 불우함이야말로 『요재지이』를 쉬 없어지지 않을 명저(名著)로 만든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 아침 차 한 동이와 담배 한 포를 마련하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큰길가로 나가 삿자리를 깔고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을 잡고 차와 담배를 권하며 이야기를 들은 뒤 집에 돌아와서는 그것들을 이야기로 꾸며 모았다. 한가한 낙방거사가 아니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재지이』가 받는 호평 중에는 당대의 삶이 정확하고도 진실되게 녹아있다는 것이 있는데, 이 또한 일평생을 남의 서사(書士)로서 고단하게 살았던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요재지이』는 '신기하지만 허황되지는 않은' 온갖 일들과 인간의 삶이 맞닥뜨리는 모든 국면을 절실하면서도 진진한 얘기로 엮어 저장한 방대한 창고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한편 한편 읽어나가면 책을 놓을 수 없는 재미뿐만 아니라, 단순한 교훈성을 넘어서는 문화적 실용까지 느끼게 한다. 홍콩 영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요재지이』를 활용하여 한 장르를 개척하고 있으며, '천녀유혼'처럼 특이한 문화상품을 세계시장에 공급하기도 했다.

이문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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