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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밀수꾼 위에 나는 세관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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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지 난 3월 초 경남 남해군 욕지도 앞 해상. 때마침 내려진 폭풍주의보로 파도는 점점 높아만가고 오가는 배의 모습이 끊긴 지 벌써 오래다.

50t급 세관 감시정의 갑판에 선 김형오(金炯午·48)광주세관 수사반장은 졸음을 참기 위해 눈을 더욱 부릅뜬 채 시계가 흐린 해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잠복 감시에 들어간지 벌써 만 하루가 넘었다.

밀수선박을 잡기 위한 김반장의 잠복근무는 두달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정보원에게서 우연히 "일제 골프채의 대량밀수가 있을 것"이란 말을 들으면서 시작됐다.

한달여의 추적 수사 끝에 가까스로 밀수범의 신원을 확인한 김반장은 이들이 일본 고베에서 골프채와 양주를 가득 싣고 몰래 광양항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밀수선박이 광양항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3개조로 편성된 조사요원들을 배치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잠복에 들어갔다.

그러나 밀수선박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김반장은 육상의 본부에 연락해 미리 파악해둔 밀수선박 기관장의 휴대전화 발신음을 추적했다. 밀수선은 일반항로를 벗어나 멀찍이 달아나고 있었다.

김반장은 즉시 감시정을 출동시켜 밀수선을 뒤쫓기 시작했다. 한 시간여의 추적 끝에 밀수선을 정지시킨 후 선박 수색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원들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며 조사요원들에게 거칠게 반항했다.

선원들을 한 곳에 몰아놓고 배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김반장은 출입구를 화물로 잔뜩 막아놓은 배밑창이 의심스러웠다. 그간 많은 선박을 수색해 본 경험에서 나온 직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배 밑바닥을 망치로 두들겨가며 들려오는 진동에 온 귀를 귀울였다. 비밀공간이 있다면 둔탁한 소리 대신 통통 튀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태권도·합기도 각 2단의 무술실력을 가진 그였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다보면 때론 이대로 배가 가라앉고 마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를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엔진 기름과 먼지가 뒤엉킨 배밑창을 샅샅이 뒤진 지 서너시간 만에 드디어 배밑창 바라스트(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물을 채워놓은 통)속에 만들어진 비밀창고를 찾아냈다.

널판을 뜯어내자 차곡차곡 쌓인 혼마 골프채 37세트와 발렌타인 17년산 60박스가 드러났다. 시가로 22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밀수품이다.

"이번 사건은 쉬운 편에 속하죠. 금괴 같은 귀금속은 기관실 연료탱크 안에 넣어 들여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코로 연료 냄새를 직접 맡아 희미한 차이를 감별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1982년 9급 공무원으로 세관에 들어온 후 통관업무를 주로 해오다 보다 활기찬 일을 하고싶어 88년 밀수단속 분야로 옮긴 지 벌써 14년째.

밀수 피의자를 뒤쫓다 차에 부딪혀 11바늘이나 꿰맨 상처가 마치 훈장처럼 이 베테랑 수사반장의 이마에 새겨져 있다.

김 반장은 지난 3월 관세청이 신설한 '이달의 관세인' 1호로 선정됐다. 전국 29개 세관에 근무하는 4천2백여명 직원중에서 최고의 밀수 수사관으로 뽑힌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전국에서 적발된 밀수는 모두 2천9백11건으로 금액으로는 1조4백53억원에 달한다.

올 들어서는 외환위기 이후 사라졌던 금괴밀수가 다시 늘어나는 데다 소형선박을 이용한 '특공대'식 밀수까지 성행하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한 세관 수사관들의 '전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4월의 관세인'으로 선정된 전충기(全忠基·53) 평택세관 휴대품 검사관. 그는 검사관이란 공식 직함 대신 '평택항의 포도대장'으로 불린다.

그의 전공은 참깨·마늘·생강 등 농산물 등이 주종을 이루는 보따리 장수들의 소규모 밀수 단속. 평택항 국제터미널을 오가는 중국인과 중국동포 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지난해 10월 평택항 개항과 함께 이곳에 부임하면서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한·중 간 여객선 승객들의 휴대품 검사 총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1인당 농산물 반입량을 규정대로 5㎏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러자 단박에 사방에서 원성이 들려왔다.

"첫 여객선에서 초과 반입된 농산물을 통관시켜주지 않자 반발이 대단했지요. 기업형 장사꾼과 조직폭력배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밤 10시까지 농성을 벌였습니다. "

주변에서는 '사정을 좀 봐주고 원만하게 넘어가는 게 어떠냐'는 권유도 있었지만 그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만사가 헝클어진다는 생각에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날 이후 관련 규정을 위반한 물량은 전량 중국으로 반송됐고 이후 배를 타고 들어온 경기도 의원과 중앙부처 공무원들도 전씨의 원칙론에 밀려 '법대로' 통관에 아무 말도 못했다.

휴대품 통관질서가 잡히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밀수색출에 들어갔다. 그의 독특한 노하우는 오랜 경험 없이는 제대로 알아내기 어려운 직관의 영역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밀수를 하는 사람은 눈동자가 왔다갔다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등 낌새가 이상하지요. 공항과 달리 항만은 생계형 보따리장수들 속에 섞여 있어 밀수범들을 좀처럼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의심스러운 기색이 보이면 대화를 나누다 허리춤을 한번 툭 쳐보면 움찔하는 느낌이 다르지요. 이때 조사에 들어갑니다. "

비과학적인 얘기 같지만 휴대품 밀수단속은 경험에서 나온 감각적 판단이 큰 몫을 한다는 게 전검사관의 설명이다.

"한번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쓰지않는 무전기 모양의 커다란 구형 휴대전화를 들고 오기에 조사해 봤더니 그 안에 비아그라가 가득 들어있었지요. 가방 밑창에 X선 투시를 막기 위해 납판을 깐 뒤 시계 1백여개를 넣어가지고 들어온 경우는 고전적인 수법에 속하지요. 지난 겨울에는 오버코트를 입고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하도 이상해 검색해 보니 허리에 양주를 무려 6병이나 둘러매고 있더라고요. 저같으면 무거워서라도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을텐데…. 기발한 착상에 웃음이 나오더군요."

'5월의 관세인'으로 뽑힌 김철수(金鐵洙·40)부산세관 외환조사과 선임조사반장은 불법외환거래 적발의 명수로 꼽힌다.

싱가포르·홍콩 등에 위장회사를 세워놓고 실제 수출입거래가 없었음에도 허위 수입서류로 정상거래인 것처럼 가장해 외화를 불법 지급하는 등 거액의 불법 외환거래를 일삼아오던 국내 유수기업들이 줄줄이 그의 손에 적발됐다.

그가 잡아낸 불법 외환거래만도 올들어 6월까지 3백50억원어치. 2000년엔 2천6백억원, 2001년엔 2천1백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컴퓨터수입업체인 M사가 환치기 업자를 통해 45만달러를 해외로 몰래 빼돌린 사실을 감추기 위해 컴퓨터에 보관된 증거자료를 모두 삭제한 뒤 범행을 부인했었지요. 그동안 쌓아온 정보분석기술을 바탕으로 컴퓨터 파일 복구시스템을 통해 증거를 찾아내 들이밀자 컴퓨터 전문가를 자처해온 그들도 고개를 숙이더군요. 요즘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범죄가 많아 외환 조사요원들도 컴퓨터 전문가가 다 됐지요."

그는 "최근 들어 경기가 회복되는 조짐을 보이자 해외 원정도박이 늘면서 도박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환치기사범이 늘어나고 있다"며 "흥청망청 외화를 낭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이병용(李丙龍·52)서울세관 조사총괄과 관세심사관(6급)은 각종 수입품의 통관신고와 관세업무를 담당해온 심사분야의 전문가.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는 통관·조사분야와 달리 각종 수출입 서류를 분석해 새는 세금이 없는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그는 올들어 41억원의 탈루 관세를 적발해낸 '세금지킴이'의 공로로 '6월의 관세인'으로 선정됐다.

'이달의 관세인'으로 선정되면 공로패와 상금 50만원이 주어지며 연말에는 이들 중에서 '금년의 관세인'이 선정된다.

이용섭 관세청장은 "앞으로 '관세인' 수상이 관세공무원들에게 '명예의 전당'으로 여겨지도록 최고의 유공 직원만을 선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달의 관세인'으로 뽑힌 사람들 중에는 기발한 공적을 세운 이들도 있지만 일선에서 자기 일에 대한 정열만으로 각종 업무를 묵묵히 수행해온 '평범한' 세관 공무원이 많다.

자유무역주의가 확산돼 모든 나라에서 관세의 장벽이 허물어지더라도 이들의 직업 정신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뽑힐 '이달의 관세인'들에게도 더욱 많은 기대와 박수를 보낸다.

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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