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왕위, 미스터리 같은 속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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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5보 (94~117)='대마불사'란 말이 있다. 대마는 여간해서 죽지않는 것이니 함부로 잡으러 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가 담긴 격언이다. 대마는 길고 생명이 질기다. 가뭄에 말라버린 듯 보이는 긴 강이 숲과 계곡을 따라 흐르며 어디선가 생명을 부지하고 있듯이 위태로워 보이는 대마일지라도 어디선가 생명을 얻어 살아난다.

하지만 지금 李3단은 흑로 급소를 치며 대마를 잡으러 나섰다. 놓치면 진다. 李왕위는 아직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다. 94는 노타임이고 96, 98, 100, 102 등이 모두 1분도 걸리지 않았다. 104,106,108,110,112,114,116도 기록표엔 모조리 노타임으로 나와있다. 이 수들은 물론 30~50초 정도 걸린 수들이다. 1분을 넘은 수도 있다. 기록자는 1분 이내의 시간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관행에 따라 노타임으로 기록한 것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묘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신중한 李9단이 대마의 생사가 걸린 이 시점에서 계속 속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도 신기한 것이다. 대신 李3단은 97의 연결에서 8분, 101의 젖힘수에 7분여를 쏟아부었다. 이 대목에선 李왕위가 과연 '신중의 극치'인지 또 李3단이 속기파인지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백이 눈을 만들려 하면 흑은 없애러간다. 검토실도 그 수순이 너무 어려운 탓인지 도통 말이 없다. 국후 두 사람도 이 부근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다만 흑은 공격하는 도중에 큰 이득을 남기고 있다.

99에 막으면 A의 돌파가 성립한다. 백 쪽 두점도 반 죽은 목숨. 대마의 생사와 관계없이 바둑은 슬슬 계가로 어울려가고 있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협찬:삼성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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