部處 기획·조정기능 강화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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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에 다시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된, 이미 수년 전에 발생했던 중국과의 마늘 관련 통상 문제와 이번에 정부가 황급히 내놓은 대응책을 보며 정부 정책의 기획·조정기능 강화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수년 전 본지 기고(1998년 2월 17일자 중앙시평)를 통해 경제정책을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차원에서 기획·조정하는 정부 기능이 강화돼야 할 뿐 아니라, 이를 위한 정부조직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제언을 한 바 있다.

정부조직 자체를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본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변화함에 따라 정부조직 또한 달라져야 함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정부 조직개편은 달라진 국내외 여건 변화와 앞으로 예상되는 변화가 요구하는 정부의 새로운 역할과 이제 더 이상 필요없는 기존의 정부 역할을 추려내는 일에서 시작돼야 한다. 오래 전에 이미 존 메이나드 케인스는 경제학자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로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적 여건과 더욱 복잡하고 다원화돼 가는 정치·사회적 여건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정부는 우선 국가가 지향해야 할 중장기 비전과 발전 전략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는 광의의 기획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와 아울러 정부 내의 부처간 의견조정과 사회 전반에 걸친 각 이해집단 간의 상충된 이해관계를 조정·설득하는 광의의 정책조정기능 또한 강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000년에 발생했던 중국과의 마늘 관련 통상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시 중국은 아직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가 갑작스럽게 발동한 중국산 마늘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는 우리의 대중국 주요 수출품에 대해 국제규범에 맞지 않는 자의적(恣意的)인 보복 조치마저 불러올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WTO의 회원국으로서 WTO 원칙을 준수해야 할 우리는 마늘을 포함하는 우리 농업의 구조적인 문제 해결은 미뤄둔 채 긴급수입제한조치와 같이 한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수단만을 고집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 당시 정부 내에 제도적인 권위와 힘이 뒷받침된 명실상부한 기획·조정 부서가 있었다면 우리의 중요한 교역상대국인 중국과의 심각한 통상문제는 일단 피할 수 있는 통상전략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우리 농업 부문 전반에 걸친 중·장기적인 구조조정 방안의 마련과 이와 상충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늘농가를 위한 일부 소득보전 시책 등 적절한 단기대응책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해 중국과의 통상 문제는 발생하였고 이로 인한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愚)를 최소화하기 위해 중국과의 협상에서 필요 이상의 양보를 강요당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국가 체면마저 크게 손상당하게 됐던 것이다. 또한 정부는 마늘 농가의 구조적인 문제해결을 오히려 지연시켜 궁극적으로 마늘 농가의 소득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마저 있는 단기적인 가격지지 위주의 마늘 농가 지원책을 내놓게 돼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늘 문제 이외에도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필요한 분야별 구조조정의 지연과 현재까지 지연되고 있는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문제, 일부 외국어 방송 국내진출 문제 등 부처간 이견과 관련 이해집단간의 이해상충을 적절히 조정하지 못함으로써 국가적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 사례도 많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정부 조직개편은 불가피하게 추진돼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재삼 강조돼야 할 일은 최근에 경험한 주요 정부 조직개편의 실패를 거울삼아 충분한 준비과정을 통해 사계의 전문가들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이 충분히 수렴돼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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