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한지(韓紙)'의 산실 장지방(張紙房)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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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열된 종이를 깐깐하게 살펴보고 있는 장용훈 옹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시중 한지보다 두 배쯤은 비싼데도 없어서 못 사는 '명품 한지'가 가평의 한 한지공방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그 흔한 인터넷 쇼핑몰도 없다. 서울서 두 시간 거리.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까지 직접들 와서 사간다.

바로 장지방(張紙房)이다. 장씨네 종이방. 자기이름 걸고 종이 만드는 곳이다.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지장(紙匠) 장용훈(71)씨와 그 두 아들이 하루 400장씩 한지를 만들고 있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공사장같은 가건물 세 개가 달랑. '노동요'일 게 뻔한 라디오 소리만 흘러나온다.

어두침침한 건물 안. 천장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바닥에도 흥건히 물이 고여있다. 큰아들 장성우(37)씨가 손에 묻은 물을 닦으며 기자를 맞이한다.

보기엔 이래도 100년 넘게 한지 외길을 걷고 있는 집안이다.

3대 장용훈 옹은 한지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겪었다. 전남 장성 태생이지만 선산이 댐으로 수몰되면서 순창으로 옮겼다. 6.25 직후에는 소실된 공문서를 복원해야 했으므로 한지 수요가 폭발적이었다. 이런 호황은 60년대까지 이어졌다. 70년쯤에 경기 가평으로 옮겨왔다. 물이 맑고 닥나무가 많아 한지 제작에 최적지였다. 이미 6~7곳의 한지 공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발 깔창 밑에 까는 중창지 만드는 곳을 제외하고는 장지방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70년대 서양 종이가 보급되면서 한지 수요가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새마을 운동도 한지업계에는 큰 타격이었다.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한옥들이 대거 헐려나가면서 한옥에 들어가는 창호지 수요도 함께 줄었다.

먹고 살기 힘들었다. 다들 전업했다. 장옹만은 미련스럽도록 가업을 고집했다. 그는 그저 "종이가 만들어지는 걸 보니 하도 신기해서"라고 소박하게 말한다.

"한참 어려울 때는 내가 이걸 만들어 뭐하려나 싶기도 했지. 그래도 내가 만든 종이는 다른 사람들 것에 비해 월등히 좋았으니. 세상에 나왔으니 이름은 남겨놓고 죽어야지."

장성우 씨가 거든다.

"인사동에 가져가면 그곳 지업사 사람들이 '밥빌어먹고 살게끔 만든다'고 할 정도였죠. 다른 종이랑 같이 진열해두면 아버지의 종이만 찾을 정도로 질이 월등히 좋으니 내놓고 팔질 못할 정도라는 거에요."

한지가 다시 빛을 본 것은 15년도 채 안 됐다. 양지로 만든 작품들이 갈라져 터지기 시작하면서 한지의 견고함이 다시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 이란 말이 있다. 종이는 천년, 비단은 오백년을 간다는 얘기다. 1966년 통일신라대 유물인 다라니경이 불국사 삼층석탑 안에서 발견되면서 종이의 수명은 천년을 간다하여 생긴 말이다.

12월부터 4월까지 닥을 수확한다. 나무에 물 오르기 전, 농한기에 미리 베어 말려두는 것이다. 닥나무는 베어도 새로 나는 기특한 나무다. 종이에는 닥껍질만 들어간다. 외피(피닥)로 만드는 종이는 창호지 정도, 고급한지는 100% 내피로 만든다. 박물관의 고문서 보수 등에 쓰이는 고급 한지는 한 장에 9천원도 한다. 그렇다면 속대는 버리느냐? 아니다. 닥을 삶는 장작으로 쓴다. 닥껍질은 잿물에 8~9시간 삶는다. 삶은 닥을 세척해 티를 골라내는 작업도 손으로 한다. 이렇게 잘 골라낸 닥의 섬유질만 모아서 기계로 간 뒤 물에 푼다. 솜처럼 곱게 풀려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응집력을 가하기 위해 황촉규라는 풀뿌리에서 나오는 진액을 넣는다. 닥풀이라고 부르는 이것을 물에 풀어 발틀로 종이를 떠내는 것이다. 틀로 떠낸 종이는 기계로 말린다. 그럼 끝나느냐? 천만의 말씀. 도침을 해야 한다. 일종의 다듬이질로 종이의 조직이 균일해지도록 두들기는 것이다.

이 중 어려운 과정은 닥 삶기. 잿물의 농도와 시간 맞추기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물질이라는 더 어려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물질은 발틀로 종이를 떠내는 것. 두께를 정확히 맞추려면 일단 닥껍질과 닥풀의 농도 조절도 필수지만 물질할 때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지장 아버지를 둔 성우씨. 노환으로 거동이 편치 않은 장옹은 잠시 오가다가도 일일이 잔소리다. 군에서 제대한 25세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와 소비자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종이와 별 차이 없는 한지를 매일 떠내고 있지만 아직 아버지로부터 단 한 번도 칭찬들어본 적이 없다.

하루 생산량인 400장이 모두 팔릴 경우 장지방의 일 순익은 100만원이다. 장지방 한지는 주로 한국화가들이 많이 찾는다. 그리고 절반쯤은 일본으로 수출된다. 일본에서는 한지를 도배지로 많이 쓰고, 중간 상인이 이곳 한지를 작품용으로 재가공하기도 한다.

장성우 씨가 말하는 좋은 종이란? "면에 윤기가 돌고 빛을 비춰봤을 때 균질 한것을 '매끄럽게 떠졌다'고 하죠"

딱 5년만 아버지 일을 돕겠다던 청년은 어느새 두 딸의 아버지가 되어 12년째 종이를 뜨고 있다. 지승(紙繩)공예도 익혀 장지방에서 만드는 한지에 부가가치를 붙이고 있다.

"좋은 한지일수록 천연 닥 사용 비중이 높아요. 싼 기계한지는 펄프와 팜유를 쓰죠. 이렇게 되면 양지와 별 차이 없어요. 한지도 성분표시해서 소비자들 선택의 폭을 넓혔으면 좋겠습니다"

장지방에서는 한지 제작과정을 궁금해 하는 이들을 위해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해 두고 있다. (문의: 031-581-0457)

▶ 한지 제조 과정

가평=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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