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그때 오늘

건국대통령 이승만, 망명지 하와이에서 잠들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그의 건국이상은 1949년 제창한 일민주의(一民主義) ‘4대 강령’에 잘 나타난다. “1. 경제상으로는 빈곤한 인민의 생활 정도를 높여 부요(富饒)하게 하여 누구나 동일한 복리를 누리게 할 것. 2. 정치상으로는 다대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계급의 대우를 받게 되도록할 것. 3. 남녀 동등의 주의를 실천해서 우리의 화복위안의 책임을 삼천만이 동일하게 분담하게 할 것. 4. 지역의 도별(道別)을 타파해서 동서남북을 물론하고 대한국민은 다 한 민족임을 표명할 것.” (사진 출처 :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 사업회).

1965년 7월 19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망명지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향년 90세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실세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난 그는 1895년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과 영어를 배우면서 자유·평등과 민주주의 사상에 눈떴다.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운동에 몸을 던진 그는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1899년 한성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사형선고를 기다리던 극한 상황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오 하나님! 내 영혼과 내 나라를 구해 주옵소서.”(‘청년이승만 자서전’, 『신동아』, 1965. 9)

그때 이후 그는 이 땅에 미국을 모델로 기독교라는 종교적 토대 위에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길 염원했다. “우리의 대의명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법 앞에서 당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민족을 일본의 군국주의적 전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목적은 아시아에 민주주의를 부식하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은 기독교를 보급시키는 것입니다.” 3·1운동이 터진 한 달 뒤인 1919년 4월 14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총대표회의’에서 결의한 ‘미국에의 호소문(An Appeal to America)’은 그의 건국이상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를 세우기로 제의함. 앞으로 오는 10년 동안에는 필요한 경우를 따라서 권세를 정부로 더욱 집중함.” 그러나 다음 날 이 회의에서 채택한 ‘한국인의 목표와 희망’에 실린 건국의 ‘종지(宗旨, Cardinal Principle)’ 제2조는 건국 후 10년간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하에서 점진적으로 민권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다.

1948년 5월 총선거를 맞아 그가 남긴 휘호 ‘방구명신(邦舊命新, 나라는 오래지만 명은 새롭다)’이 잘 말해주듯 그는 유교와 다른 전통종교의 장점을 아우르는 바탕 위에서 한국적인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제헌국회 의장이었던 그는 1948년 7월 공포·발효된 헌법의 제정 과정에서 이 땅에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되, 그 정부 형태를 ‘전제독주를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택하도록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가 귀천(歸天)한 지 45년이 흐른 오늘도 그의 군림(君臨)하는 제왕적 통치방식 때문에 치적에 대해서는 시시비비(是是非非)가 그치질 않는다. 그러나 민족의 광복에 큰 궤적을 남긴 불요불굴의 항일 독립투사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토를 달 수 없듯이, 민주주의·평등주의·자본주의 등의 요소가 담긴 건국이상은 아직도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좌표로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