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메단에서] 행정조직 붕괴 … 식량·약품 전달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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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서북 지역의 교통 중심지인 메단시의 국제공항. 지난해 12월 26일의 해일로 수만명이 숨진 반다아체 시(市)에서 700㎞ 떨어진 이곳에는 2일 피해지역으로 가려는 구호단체 회원과 취재진 수백명 등 외국인으로 북적댔다. 이들은 모두 한시바삐 반다아체시로 가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공항 당국의 늑장 대처 등으로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공항에는 '위기관리센터'가 마련되고 구호물자의 분류.수송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항공기에 물자를 실을 장비나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때문인지 약품 등을 싣고 반다아체로 가는 군 수송기가 공항에서 8시간 이상 발이 묶여 있기도 했다. 구호대와 국제기구 관계자들을 실어나를 민항기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전날까지도 하루 두세 차례 반다아체 공항으로 가던 비행기들이 이날은 모두 운항이 멈췄다. 공항 측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기자는 이날 10여 시간을 기다려 반다아체로 가는 군 수송기의 자리를 간신히 얻었으나 구호물자에 우선순위가 밀려 비행기에서 내려와야 했다.

한국인 피해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30일 반다아체로 갔다가 메단으로 돌아온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조건희(47)영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고 했다. 조 영사는 반다아체의 프랑스계 시멘트 공장 책임자로 일하다 실종된 은희천(61)씨 부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현지에 갔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은씨는 지난해 8월 국산 경비행기 '보라호'를 시험 비행하다 추락사한 항공대 은희봉 교수의 친형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구 30만명인 이 도시의 피해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사고 발생 초기에 외신들은 약 3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했지만 현지에서는 8만~9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다아체에서는 그나마 교통편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 주민 수만명이 메단 등지로 빠져나오고 있다.

메단 시내에서 만난 한국인 홍재권(50)씨는 "반다아체에서 조금 떨어진 따부융 지역에서 목재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집을 잃은 현지 주민 150명이 공장 사무실을 차지한 상태"라며 "해일 때 다행이 메단에 나와있어서 몸은 멀쩡하지만 언제 작업을 재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피해지역 목격자들에 따르면 반다아체는 군.경찰.행정조직이 모두 붕괴돼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말레이시아.호주.한국 등의 구호단체가 속속 도착하고 있지만 구조.구호활동을 조직적으로 활용할 통제본부가 없는 것이다.

현장을 다녀온 외신기자들은 "해외에서 반다아체로 긴급 공수된 구호물자의 대부분이 현지 군 관계자나 경찰에 의해 빼돌려지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수십년 지속된 반군과 정부군의 유혈충돌 속에서 현지 행정조직 자체가 부패해 구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경찰이나 군인이 현지 국제 구호단체로부터 통행료 등을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일이 있다고도 했다.

반다아체의 가장 큰 문제는 식량과 식수난. 한국에서 간 기아대책 선발팀원도 생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며, 현지 주민들은 시신들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많은 주민은 벌써 복통을 호소하며 외국 사람만 보면 약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의료 사정도 최악이긴 마찬가지. 현지의 의사와 간호사 대부분이 해일 피해를 본 데다 병원에 약품이 거의 없어 사실상 진료를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아체는 지금 기아와 전염병이라는 제2의 대재앙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공항에는 피해지역에서 돌아온 외신기자나 인도네시아 관리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현장 상황을 묻자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처참하게 부서진 건물과 '엑소더스(대탈출)'를 위해 몸부림치는 굶주리고 헐벗은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한 외신기자는 "그곳은 저주받은 땅이 됐다. 반다아체 도심에서 해안으로 향하는 크루엥아체강 다리 밑에는 시신들이 떠 있고, 길거리에 방치돼 있는 시체들은 무더위 속에서 빠르게 부패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반다아체에는 인도네시아 기자 20여명은 물론 CNN과 BBC방송, AP.AFP.로이터통신 등 외신기자 30여명 등 50여명이 취재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당수가 인도네시아 현지인 출신인 외신기자들은 "예전부터 아체주 주둔 정부군과 반군에 지인들이 있어 손쉽게 반다아체 진입에 성공했으나 외국인 기자들은 출입이 통제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메단(인도네시아)=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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