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학생들에게 ‘시험 볼래 말래’ 묻는 교사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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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호 02면

서울의 영등포고에서 60여 명의 2학년 학생들이 13일 치러진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를 거부했고 학교장이 이 사실을 은폐하려 한 일이 발생했다. 시교육청 담당자가 조사해 보니 학생들은 “선생님이 시험 안 볼 사람 손 들어보라”고 했다고 전했다.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고 안 보는 ‘선택의 자유’를 부여한 흔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 배경에는 교과부와 교육청의 갈등이 깔려 있다. 갈등도 보통 갈등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갈등이다. 교육 현장의 정치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교육의 정치화 문제를 따져볼 계기가 됐다.

경제 영역이나 정치 영역에 본래적이거나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은 문제들도 상업화되거나 정치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렇지만 국가안보와 교육은 정치와 경제를 초월해야 하는 영역이다. 물론 국가안보와 교육은 국방 산업과 교육 산업을 통해 경제 영역과 연계돼 있다. 그러나 국방·교육 산업은 국가안보·교육이 부과하는 필요에 종속돼야 한다. 주종 관계가 확실해야 한다.

국가안보와 교육에는 또한 좌우가 없어야 한다. 정권이 바뀐다고 총 쏘는 법이 달라지지 않는다. 정권이 바뀐다고 이번에 평가하려고 한 ‘학업성취도’의 내용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국가안보와 교육이 정파적 정쟁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되는 이유는 국가안보와 교육이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가안보가 지금 이 순간의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라면 교육은 미래의 생존을 설계하고 보장하는 수단이다.

적군이 쳐들어 오는데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싸울래 말래”라고 물을 수 없다. 특히 정파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물을 수는 없다. 애초에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가 표본을 뽑아 일부 학생만 보게 하는 시험이었다면 “시험 볼래 말래” 하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평가는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물은 배경에는 교육 현장의 정치화 현상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을까. 학교장이 이번 일을 숨기려고 한 이유 또한 궁극적으로는 교육의 정치화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뜻하지 않게 ‘시험 선택권’을 부여 받아 ‘안 보겠다’고 답변한 학생들도 본의 아니게 교육을 둘러싼 정치싸움에 연루된 희생자다. 지금이라도 교육 현장의 탈정치화(de-politicization)를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에 대한 찬반 양론의 근거를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에 대해선 사교육 강화, 경쟁 교육 심화의 가능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찬성하는 측에서는 평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부진한 학생에게 보충지도를 실시하고 우수학생에게는 성취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양쪽이 주장하고 예상하는 바를 따질 때에 잣대로 요구되는 것은 정치적 이해가 아니라 교육적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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