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주회 프로그램에도 테마가 있게 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회 프로그램,즉 레퍼토리 구성은 연주자에게 결정권이 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보고 공연 관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관객이다.

연주곡목에 상관없이 눈 딱 감고 표를 사는 것은 스타급 유명 연주자의 공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음악회 프로그램 짜기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레퍼토리가 정해지면 공연의 절반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연주자는 서양음악사의 보고(寶庫)에서 명곡을 골라 전시회를 꾸미는 큐레이터다. 연주자에게 프로그램은 명함과도 같은 존재다.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보면 음악회에 가기 전부터 군침이 돈다.

하지만 매일같이 열리는 귀국 피아노 독주회 프로그램을 보면 영락없이 이것 저것 뒤섞인 샐러드다. 바흐나 하이든으로 시작해 베토벤이나 쇼팽을 거쳐 드뷔시나 리스트로 마무리한다. 고전에서 낭만·근대에 이르는 시대순 배열이다. 가장 쉽고 보편적인 프로그램이지만 각각의 작품을 연결해주는 주제나 음악적 연관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곡-협주곡-교향곡으로 이어지는 오케스트라 연주회도 마찬가지다.

주제가 있는 프로그램은 어떨까. 가령 멘델스존의'고요한 바다와 행복한 항해', 드뷔시의'바다', 엘가의'바다의 소묘'를 같은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사계절을 주제로 글라주노프의'사계'나 슈만의 교향곡'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1번'겨울의 몽상', 스트라빈스키의'봄의 제전'을 연주해도 흥미롭다.

독창회에서도 한 작곡가나 작사자(시인)의 작품만으로 프로그램을 엮을 수 있다. 꽃·자연·자장가·새·동물 등의 주제도 가능하다.'음악가와 화가'라는 타이틀을 내건다면 충분한 얘깃거리가 된다.

첫 곡은 너무 길지 않아야 한다. 연주자나 청중 모두 워밍업을 해야 하고 뒤늦은 입장객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짧은 앙코르 소품으로만 프로그램을 꾸미는 것은 한 시간 내내 스낵이나 디저트만 집어먹는 꼴이다. 그렇다고 비프 스테이크와 감자 푸딩만 너무 많이 먹어도 질리기 쉽다. 음식의 맛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요리를 어떤 순으로 내고 어떻게 접시에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음악회에서도 정성이 듬뿍 담긴 참신한 프로그램 없이는 고객 만족을 기대할 수 없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