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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환 수술 실패한 록가수의 자아찾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영화 '헤드윅'은 다면체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남성과 여성, 음악과 권력, 역사와 개인 등 곱씹어 볼 요소가 풍성하다.

곳곳 발랄한 애니메이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음악이다. 영화 자체가 록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전편에 흘러넘치는 강한 비트에 몸을 맡기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감독·주연·각본을 도맡은 존 캐머런 미첼은 심지어 노래방을 연상시키는 화면도 끼워 넣었다. 관객도 동참해 노래를 부르자는 것이다.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 가사를 따라갈 순 없겠으나 아이디어 하나는 분명 재치있다.

'헤드윅'은 일부 기성세대에게 불쾌한 영화일 수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된 성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남녀노소의 차이를 뛰어넘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송가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겉으론 제법 심각하다. 더욱이 비극적이다. 동베를린 태생의 소년 한셀이 록가수의 꿈을 이루려고 미군 병사와 결혼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셀이 여자가 돼야 한다는 것. 본의 아니게 수술대에 오른 한셀. 그러나 수술은 실패로 끝난다. 남자의 상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1인치가 남은 것. 엄마의 성을 따라 헤드윅이란 이름도 지었건만 말이다. 원제 '헤드윅과 앵그리(성난) 인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런 상황을 가리킨다.

미국으로 건너간 헤드윅의 고행은 계속된다. 그가 손수 록을 가르친 토미 노시스(마이클 피트)가 '스승'의 노래를 가로채며 대스타로 떠오른 반면 정작 헤드윅 자신은 '앵그리 인치' 밴드를 이끌며 값싼 음식점을 전전한다. 그것도 토미의 공연장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투어'일 뿐이다.

통일 전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졌던 독일 사회,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초콜릿을 쫓아다녔던 한국의 소년을 떠올리게 할 만큼 미군이 던진 캔디에 넘어가는 한셀, 그리고 무엇보다 성 정체성으로 갈등을 계속하는 헤드윅의 자아 찾기가 안쓰럽게 표현된다.

자칫 어둡고 우울하게 비칠 수 있는 '헤드윅', 그러나 감독은 정반대의 색채로 영화를 화려하게 치창한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처럼 공연 현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중간 중간 헤드윅의 회상(플래시 백)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매끄럽게 연결한다.

앙증맞은 애니메이션도 곳곳에 배치했다. 예컨대 남성과 여성을 함께 지녔던 자웅동체형의 인간이 어느날 천둥·번개를 맞고 둘로 갈라져 서로 싸우다 화해하는 모습 등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실사 영화에 부분적으로 삽입된 그래픽만을 놓고 볼 때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만화에 견줄 만큼 더욱 경쾌하고 신선하다.

'헤드윅'은 잃어버린 '나의 반쪽'을 찾아나선다. 플라톤의 『향연』에 나타난 남성간의 순수한 사랑, 성경에 그려진 아담과 이브의 탄생 등 고전을 슬쩍슬쩍 언급하며 남녀의 성차, 나아가 그에 따른 역할 분담을 당연시하는 상식적 가치관을 전복시킨다. 자유와 젊음을 지향하는 록의 정신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나는 두 개로 찢어진 마을에서 태어났지. 의사의 수술대에서 한 조각을 잃었어. 한 다리는 남자, 한 다리는 여자. 나는 콜라주, 그냥 꿰매진 몽타주"라고 노래하는 헤드윅은 우리가 평상시 잊고 사는 나의 또다른 부분, 즉 불완전한 나 자신일 수 있다.

'인간의 가치' 파고들어

'헤드윅'이 단순한 트랜스 젠더(성전환자)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파고든 작품이란 느낌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게다가 발라드부터 하드록까지 섭렵한 스티븐 트래스크의 음악이 있으니…. 초현실적 환상이 짙게 깔린 화면도 매혹적이다.

사족 하나. '헤드윅'은 15세 이상 관람가다. 영화 수입사 측은 성 문제란 제법 민감한 내용과 표현으로 '18세'를 예상했으나 '15세'가 나왔다고 즐거워했다. 관객층이 두터워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문화 수용폭이 넓어진 것일까. 8월 9일 개봉.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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