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구두상품권'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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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27일 오후 '상품권 매매'라는 간판이 붙은 서울 명동 L상사 사무실에 30대 중반의 남자가 신용카드로 10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 2백만원어치를 6개월 할부로 구입했다. 그는 이어 상품권을 장당 9만2천원, 모두 1백84만원에 상품권을 사고 파는 인근 구두수선점에 넘기고 사라졌다. 이같은 방법은 신용카드로 상품권을 구입해 이를 다시 현금화하는 일명 '상품권 카드깡'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특히 공중전화카드 형태의 선불식 상품권(PP카드)에 이어 종이상품권도 개인이 신용카드로 살 수 있도록 한 재정경제부의 '여신금융업법 시행규칙 개정안'이 8월 말 실시되면 백화점 상품권을 활용한 카드깡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백화점 업계는 제도 시행 자체를 반대하고 나선 데 이어 산업자원부도 유통질서 혼란을 이유로 반대의사를 표명해 정부 부처간 마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재경부는 백화점 이외에는 신용카드로 상품권을 판매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활용한 상품권 카드깡은 오히려 줄어든다며 반박하고 있다.

◇상품권 시장, 어떻게 바뀌나=재경부 정책의 골자는 종이상품권에 대한 신용카드 구입 허용과 백화점 상품권 발행자 이외에는 신용카드로 상품권을 판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상품권 중 PP카드는 지금도 1인당 50만원까지 신용카드로 구입이 가능하다.

반면 종이상품권은 법인의 경우 신용카드 사용이 허용되지만 개인은 안된다. 그러나 현재 입법예고 중인 시행규칙이 실시되면 개인도 신용카드로 종이상품권을 살 수 있게 된다.

급히 돈이 필요한 신용카드 소지자들은 카드회사와 가명계약을 했기 때문에 일명 가맹점이라 불리는 매매업자를 통해 상품권을 구입한 뒤 이를 구두수선점 등 상품권 매매 가판점에 할인해 판다. 가판점으로 넘어온 상품권은 몇단계를 더 거쳐 다시 가맹점으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가맹점은 10만원짜리 상품권을 팔고 이를 되사는 과정에서 6천~7천원의 수익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시행규칙이 실시되면 가맹점들이 자신의 사업자명으로 상품권을 판매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카드깡 급증' 논란=백화점 업계는 종이상품권을 신용카드로 살 수 있게 되면 지난해 4조5천억원이었던 상품권 시장은 30%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처럼 매출이 느는데도 백화점 업계가 반발하는 것은 상품권을 이용한 카드깡이 늘어 유통 물량이 급증하면 상품권의 효용과 품격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백화점협회 관계자는 "지금까지 개인들은 신용카드로 구입할 수 있는 상품권 액수가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가맹점을 이용한 카드깡을 주로 이용해왔다"며 "그러나 종이상품권마저 제한없이 살 수 있게 되면 가맹점을 이용한 카드깡은 줄겠지만 백화점에서 신용카드로 상품권을 산 뒤 중간 판매업자에게 할인한 가격으로 팔아넘기는 사례가 더욱 늘어나 결국 상품권 유통시장이 어지럽혀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카드깡을 통해 백화점 상품권의 유통물량이 많아지면 현재 8% 전후인 할인율은 더욱 올라갈 것이고 결국에는 평균 25%인 제화상품권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것이다.이 경우 제화상품권의 대량 유통으로 4~5년 전에 비해 구두가격이 1백% 이상 비싸진 것처럼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의 가격도 꾸준히 상승한다면 이는 결국 소비자 부담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경부의 견해는 다르다. 재경부 변양호 금융정책국장은 "현재 가맹점을 통한 상품권 유통물량이 엄청난데 이번 조치로 가맹점 사업이 거의 불가능해져 오히려 상품권 카드깡은 줄어들 수 있다"고 밝혔다.

김준현·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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