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고향 영웅' 푸틴'국민 영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출발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지 열흘 만인 25일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한 한·러 친선특급열차는 우랄산맥의 가파른 준령(峻嶺)을 눈앞에 두고 대장정에 지친 엔진을 잠시 멈췄다.

러시아 기계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공업도시인 예카테린부르크는 러시아 연방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의 고향이기도 하다.

옐친을 낳은 이곳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에 반기를 든 1991년의 보수파 쿠데타를 맨주먹으로 탱크 위에 올라서서 막아낸 옐친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데 고향사람들은 조금도 인색함이 없다.

옐친의 모교인 국립 우랄공과대학의 교정 곳곳엔 그를 찬양하는 헌사가 대형 초상화와 함께 걸려 있다. 옐친의 까마득한 후배 옥산나 부즈디간(28·토목공학과 박사과정)은 "92년 이후 러시아는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혁명기를 겪었고 옐친은 그런 상황에서 훌륭한 관리자였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이처럼 옐친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의 재임기간에 예카테린부르크의 산업이 활력을 되찾은 데에도 원인이 있다.

한국계인 우랄종합대의 블라디미르 김(67·철학)교수는 "옐친 재임시절 군수산업의 쇠퇴를 대신해 석유·철강·기계 등 산업발전이 이뤄져 평균 15%의 고성장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옐친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가 된다.친선특급이 지나온 곳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옐친을 "무능하고 노쇠한 지도자"로 폄하했고, 심지어 "주정뱅이"라거나 "수마세드세 옐친(미치광이 옐친)"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다.

옐친 재임 시절 극도의 물자부족으로 하루종일 빵가게 앞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장사진을 이뤄야 했던 상황은 러시아인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다. 그 와중에 체첸 분리운동이 격화돼 모스크바 도심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치안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반면 집권 3년째에 접어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러시아의 옛 영광을 재현할 '구세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TV 광고의 한 장면은 그런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금발의 젊은 여성이 위급한 상황에서 "파마기테 푸티누(도와줘요 푸틴)"라고 외치며 SOS를 청하자 검정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신사가 등장해 여성을 구해 주는 것이다. 그가 옛 소련 시절 악명이 높았던 비밀경찰(KGB)출신이란 점도 러시아인들에겐 허물이 아닌 듯하다.

그는 옐친에 의해 총리로 발탁되고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지만 옐친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택했다.'강한 러시아'를 표방한 그는 나라 살림을 휘두르던 신흥재벌세력 '올리가르흐'를 몰아내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사이 경제위기가 깨끗이 극복됐고 국제사회에서도 러시아의 위상은 한결 높아졌다. 푸틴은 직접 비행기를 몰고 체첸 전쟁 현장에 날아가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25일 노보시비르스크 역전에서 만난 시베리아 항공사 직원 가브리나 라브렌치바(26)는 "푸틴은 러시아 젊은 여성들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푸틴은 똑똑하고 착하고 예리하다"고 대답했다. 러시아 사회를 뒤덮고 있는 '푸틴 신드롬'이 러시아의 장래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 주목된다.

예카테린부르크=정효식 순회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