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만에 다시 불러 본 "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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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1964년 2월 경북 상주군 공성면의 옥산 국민학교(당시) 우하분교.백두대간 자락인 해발 7백m '큰재'에 자리잡은 이곳의 교문을 갓 스물 젊은 선생님이 나서고 있었다. 그 뒤로 늘어선 서른 한명의 3·4학년 아이들. 귀 위까지 올라가는 단발머리 꼬마 아가씨, 기계충 때문에 만화 주인공 '꺼벙이'처럼 군데군데 머리가 빠진 개구쟁이 소년, 모두 눈물이 글썽했다. 아이들은 묵묵히 선생님의 뒤를 따라 고갯길을 내려갔다.

"이눔들아, 들어가라니까."

이때만큼은 누구도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말없이 걷기를 십리.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공부를 더 하러 서울로 향하던 젊은 교사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한마디를 억지로 눌렀다. "그래, 그냥 여기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게."

세월이 흘러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던 한 소년은 경찰이 됐다. 90년대 초 경찰의 신원조회 전산망이 만들어지자 제자는 틈 날 때마다 헤어진 선생님을 찾았다. 하지만 5년 동안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제자는 결국 그리운 사람을 찾는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노크했다. 마침 이 프로그램을 본 스승의 장모와 통화가 됐다. 97년, 그러니까 헤어진 지 33년 만의 일이었다.

스승은 미국에서 과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래서 국내 신원조회망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화 통화가 이뤄졌다. 얼마 뒤 스승에게서 편지가 왔다.

"전화 받던 날, 바로 편지 쓰겠다고 앉으니 30여년 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말하고 싶고 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무슨 얘기부터 시작할까 재어보기만 하다가 감히 서두를 못 정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버렸네…"

그해 한국에 온 선생님과 재회가 이뤄졌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회도 대접하고, 파주군 통일 동산에도 함께 갔다. 그 다음부터 스승이 한국에 올 때면 어김없이 만났다.

미국 자동차회사 GM의 화학·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인 조병권(58)박사와 노량진 경찰서 손문호(48)보안반장. 그들은 이달 중순에도 함께했다. 조박사가 서울 역삼동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세계 한민족 과학기술자 종합 학술대회' 참석차 고국을 찾았고,이 소식을 들은 손반장이 스승을 뵈러 온 것.

"선 생님께서 겨울에 수업이 끝난 뒤 교실 난로에 김치를 지져 드시던 생각이 나네요. 구수한 냄새에 끌려 친구들하고 군침을 흘리며 몰래 창문너머로 훔쳐보다 '같이 먹자'하시면 부끄러운 마음에 후다닥 도망치곤 했죠."

"모두들 참 순진했어. 미국에서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을 보니 그때 생각이 나더구만. 겨울이면 모두들 난로에 땔 장작을 하나씩 들고 학교에 오곤 했지. 그런데 아침마다 내가 우물로 세수하러 갔을 때 교실 옆 사택에다 산딸기를 한움큼 놓고 가고 했던 건 누군가?"

손반장은 굳이 조박사를 찾은 것에 대해 "어렸을 때지만 큰 인물이 되실 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서"라고 했다.

그의 어릴적 예감은 적중했다. 62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은 조박사는 과학을 공부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64년 우하분교 어린이들과 이별하고 서울대에 들어갔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화학공학 박사가 됐고, GM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오염물질을 덜 내뱉는 엔진을 개발해 97년 미국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조박사의 교사 시절에 대해 손반장은 "회초리를 자주 드시던 분"이라고 회상했다."제가 열살, 그러니까 3학년 때 처음 오셔서 담임이 되셨습니다. 분교라 3·4학년이 한반이었는데 한글을 모르는 친구가 많았습니다. 전의 선생님들은 숙제를 해오든 말든 이었거든요. 하지만 (조병권)선생님께서는 불호령이셨죠. 얼마 안 지나 모두 한글을 깨치고 구구단을 외우게 됐습니다."

90 년대 초 신원조회망으로 스승을 처음 찾기 시작했을 때 아는 정보는 이름과 경북이 고향이라는 것, 그리고 대략 50세 쯤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20명 넘게 나오더군요.주소를 확인해 모두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전부 자신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찾다찾다 결국 방송사 문을 두드린 거지요."

"손군이 얘기하는데 신원조회에 나오질 않아 제가 죽은 줄 알았답니다. ROTC시절인 60년대 말 우하분교 생각이 나서 짬을 내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군복을 입고 갔더니 손바닥만한 산간 마을에 '선생님이 군인 되셨다'는 소문이 쫙 퍼졌죠. 그 얘기를 들은 손군이 제가 월남전에 가서 전사한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시간이 나면 꼭 함께 추억이 어린 우하분교에 들러보겠단다.학교는 79년 문을 닫았지만 흙벽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얼마 전 고향에 다녀온 손반장이 전했다.

"선생님께서 40년 전 학교 마당에 심으신 플라타너스 묘목이 이젠 제법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게 됐습니다."

"이사람, 자네도 아름드리 나무가 됐잖은가."

글=권혁주·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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