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희망을 말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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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05년 새해를 맞았다. 올해는 좀 나아질까. 누구도 선뜻 이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지난해가 너무나 고단한 한 해였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기가 죽어 지냈고, 많은 가장이 직장을 잃어 어깨가 처졌다. 기업인들은 일년 내내 아등바등 기업을 살리려고 애썼지만 나라가 점점 사업하기 어렵게 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럼에도 이 아침 우리는 감히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우리가 바라는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치의 을사조약 100년이 되는 올해, 우리 선조가 조국 해방의 꿈을 안고 시련을 이겨 광복을 맞았듯이 우리는 이 험하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새벽은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어둠 뒤에 찾아온다. 뺄셈 뒤에는 반드시 덧셈이 온다.

우리가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국민의 저력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됐다.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뭉쳤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같은 하나 됨과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뭉친다면 헤쳐나가지 못할 일이 없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 조화를 찾아야 한다. 대립.분열.갈등으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이를 똑똑히 봤다. 하나 됨의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경제회생이다. 올 한 해는 나라의 모든 관심과 역량이 이에 모아져야 한다.

정치권은 이제부터라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길 바란다. 정치 본연의 임무는 갈등의 통합이다. 지금처럼 갈등을 조장하고 확대하고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새해에는 재보궐선거가 있다. 여야의 결사적인 경쟁이 벌써 불을 보듯 뻔하다. 과반을 지키려는 여당과 이를 무너뜨리려는 야당이 충돌하면 국민만 골병든다. 정부는 엄격한 선거관리를 통해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도록 하고 국민 역시 철저한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과반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가 경제 살리기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느냐가 초점이 돼야 한다.

우리의 외교안보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하다. 2년여간 끌어온 북핵 문제는 파국이냐, 대타협이냐의 기로에 섰다. 남북 간 대화와 신뢰 구축이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한.미 동맹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물론 한.미 관계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과 안보의 초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국정은 경제로 모아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다. 대졸 실업자가 넘치고 40대 가장이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헤맨다면 우리 사회는 미래가 없다. 정부는 5% 성장에 40만개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삼았다. 전망은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기업이 투자하도록 기업인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 돈 가진 사람들이 지갑을 열도록 불안감을 없애줘야 한다. 그것이 정부와 정치권이 할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에 매진하겠다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 표명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경제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는 불투명한 정책과 혼선으로 국민과 기업에 혼란을 주지 않아야 한다. 이미 우리 경제는 2년간 세계 평균 성장도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성장의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더 이상 분배냐 성장이냐의 논쟁으로 힘을 낭비해선 안 된다. 올 한 해만이라도 성장을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우선 불씨부터 살리는 것이 시급하다.

그렇다고 빈부격차 해소에 대한 대책과 관심이 소홀해서도 안 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기초생활보장수권자와 차상위 계층의 생존을 위한 국가 차원의 복지정책을 보다 체계화하고 확충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웃을 살펴보고 돌보는 따뜻한 마음과 봉사,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노사관계도 공동체 정신으로 임한다면 풀지 못할 문제가 없다.

지난 한 해 진행된 신행정수도 건설 논란은 충청권 주민뿐 아니라 국민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은 소모적인 논쟁이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 전체에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후속대책이 마련되길 바란다. 당장 눈앞의 피해구제 차원에서 수립되는 후속대책은 또다시 혼란과 비용만 가져올지 모른다. 국토 균형 발전은 신행정수도 건설과 별도로 지방 분권, 기업도시 건설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중앙일보는 올해로 40년이 되었다. 청년기를 지나 이제 장년에 이르른 것이다. 중앙일보는 이제 이 나라의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았다고 우리는 자부한다. 그만큼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 우리는 지금까지와 같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틀 속에서 사회의 통합자, 갈등의 화해자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서로 다른 주장과 신념이 중앙일보를 통해 수렴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겠다.

올해 중앙일보는 홍석현 발행인의 주미대사 취임으로 인해 큰 변화를 맞게 됐다. 우리는 홍 회장이 나라를 위해 큰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그는 지난 10년 청년기의 중앙일보를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이제 중앙일보는 대주주의 거취와 상관없이 지금까지와 같이 언론의 바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잘못된 권력에 대해서는 당당히 비판하고, 부패한 사회를 향해서는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이다. 또 우리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비추는 등불 역할에도 충실할 것이다. 이를 위해 신문 내부도 투명하고 공정한 장치로 보강할 것이다. 독립적인 편집과 건강한 경영이 함께 가도록 할 것이다. 중앙일보는 독자들의 채찍과 사랑으로써 이만큼 성장했다. 앞으로도 독자의 응원과 격려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독자와 더불어 최고의 신문, 신뢰받는 신문이 될 것을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