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5>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34.패션 스타킹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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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스타킹은 원래 남성용이었다고 한다. 4~5세기 성직자들이 법의(法衣)의 격식에 맞춰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성의 차지가 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반바지를 입고 지내던 남성들이 긴 바지를 입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1957년 나일론 스타킹을 생산한 게 시초였다. 세계에서 처음 개발된 것은 원래 45년인데, 국내에는 10여년 늦게 들여온 셈이었다.

국내에서 나일론 스타킹의 시대는 40년 동안 이어졌다. '고탄력 스타킹'의 인기가 92년부터 치솟고 나일론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탄력'의 매출은 90년 6백만, 91년 1천5백만, 92년 3천1백만 켤레로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이 선풍이 있기까지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던 셈이다. 고탄력 스타킹을 선보인 게 83년이었으니까.

"전문경영인이 그런 아이디어를 냈더라면 목이 열개라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직원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하고 넘어갔다.

90년대 중반 고탄력 스타킹으로 재미를 막 보려던 참이었다. 영업담당 임원이 우거지상이 다 되어 보고를 청했다.

"회장님, 이상합니다. 매출이 줄고 있습니다."

스타킹 사업에 뛰어든 이래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해마다 늘기만 하던 매출이 뒷걸음을 치다니. 적색 경보에 놀란 우리는 원인을 찾아나섰다. 사회는 이미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우리만 낡은 레코드판에 안주하고 있었다.

스타킹 산업에 불리한 변화는 곳곳에서 감지됐다.유니폼을 없애는 직장이 늘어났다. 스타킹을 내팽개치는 직장 여성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른바 '맨다리' 패션이 유행하고 있던 것이다.

스타킹 신는 것을 '예의'로 생각했던 여성들은 더이상 '족쇄'를 차지 않으려고 했다.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 여성들은 앞다퉈 굴레를 벗어던질 기세였다.

"이러다간 스타킹 산업이 설 땅을 잃는 게 아닐까."

나에게는 최대의 위기였다. 어떻게 일궈낸 시장인데. 그것도 고탄력 스타킹 시장을 개척해 단꿈을 미처 챙기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훌쩍 해외로 나갔다. 유럽 시장을 돌고 미국 백화점을 뒤졌다.

"여기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쓰러진다."

지푸라기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여성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인지를 골똘히 연구했다. 해외 시장은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스타킹도 패션이다."

선진국의 유행은 이미 기능성 스타킹으로 바뀌고 있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진 소비자는 품질 수준이 높아진 제품을 원했다.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나는 열쇠를 기능성 스타킹에서 찾았다. 스커트를 입을 때 다리를 보호해주는 양말 수준으론 더이상 여성을 붙잡아둘 수 없었다. 패션 액세서리의 노릇이 필요했던 것이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스타킹에는 또다른 악재가 나타났다. 여성들은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즐겨 신기 시작했다.

나는 기능성 스타킹 출시를 서둘렀다.

"싸구려 대신 고가품으로 밀고 나가자."

스타킹 한 켤레를 짜는 데는 8천8백33m의 원사가 들어갔다. 이를 고급으로 쓰기로 했다. 1천~2천원짜리 스타킹만으론 안된다고 생각했다. 1만원 안팎의 기능성 제품을 만드는 고가 전략에 힘을 실었다.

'25포인트 스타킹'은 다리 모양에 맞춰 스타킹을 짠 것이다. 스물다섯 부위로 나눈 다리에 관한 자료를 편직기에 입력해 각선미를 살려주도록 짜는 것이다.

자외선을 절반 이상 차단하는 'UV 컷', 덧버선 형태의 '누드 스텝', 임산부를 위한 '더블 엑스라지' 등도 틈새시장을 개척한 기능성 스타킹이다.

기능성 스타킹은 이제 30여가지에 달해 스타킹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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