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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젊은 영화 상영 매니어들의 공간 만들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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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1면

미로비전 채희승(28)대표는 영화계의 '젊은 피'를 자부한다. 서른이 안된 '어린' 나이를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새로운 눈, 영화계에 대한 야무진 꿈을 '무기'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사실 그에겐 '한국 영화계 1호'라는 꼬리표가 다수 따라다닌다. 간단하게 훑어 보면…. 첫째, 한국 최초 우리 영화 해외배급 및 독립영화 배급 전문회사 미로비전 설립(1998년 8월). 둘째, 한국 최초 칸영화제 마켓에 영업 사무실 개설(99년 5월). 셋째, 국내 최초 16㎜ 단편영화 '하우등' 상업극장에서 개봉(99년 7월). 넷째, 국내 최초로 아시아 영화(일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강령') 전세계 배급 계약 등이다.

그가 또 일을 벌였다. 지난 4월부터 국내 처음으로 상업극장(중앙시네마)에서 단편영화를 매일 상영하고 있다. 이어 지난 12일엔 문화의 거리인 서울 인사동에 복합영화문화공간 미로스페이스를 개관했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이란 고사성어마저 연상된다.

그간의 활동을 열거해놓고 보니 그가 마치 대단한 야심가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앳된 표정마저 아직 남아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벤처''대표'에 함축된 사업가적 기질을 감지하기 어렵다. 그저, 선하게만 보이는 수줍은 미소와 마주칠 뿐이다.

"그냥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어요. 오매불망 영화밖에 모르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매주 신문에 난 영화광고를 잘라 저만의 스크랩 북을 만들기도 했어요. 개봉 영화와 각 영화의 관객수를 담은 나름의 흥행표를 작성했던 것이죠."

편집광에 가까웠던 '시네마 키드'가 영화계에 입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대학(연세대 경영학과) 시절 영화 전문지 시네21의 객원기자를 거친 것도 우연한 선택이 아니다.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칸·베니스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취재하면서 직접 겪었던 안타까움 때문에 영화사를 차렸다고 했다. 대학까지 휴학하면서 말이다.

"수출은 둘째 치고 홍보조차 제대로 안되는 한국 영화에 대한 울분에서 '사고'를 쳤습니다. 지금이야 상황이 후천개벽 비슷하게 달라졌지만 당시에 우리 영화는 일본·중국 영화의 들러리에 불과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해외출장을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익힌 영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영화 지식, 그리고 영화제를 순례하며 쌓은 국제 감각이 큰 도움이 됐다. 요즘엔 대형 영화사마다 국제업무팀을 운영하고 있지만 불과 4년 전만 해도 미로비전은 한국 영화계의 거의 유일한 해외창구였다.

99년 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송일곤 감독의 '꽃섬'을 세계에 알렸고, 그해 밀라노 영화마켓에선 '텔미썸딩''주유소 습격사건' 등으로 70만달러를 계약하는 성과도 올렸다.

채대표는 이와 함께 새로운 시각이 돋보이는 외국 감독의 작품을 국내에 알리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올해 '디 아더스'로 히트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오픈 유어 아이즈'(99년), 200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 등이 대표작이다. 또 올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중국 감독 류빙지엔의 '크라이 우먼'을 중국과 공동 제작하는 등 앞으론 한국 영화의 첨병 역할을 뛰어넘어 아시아 영화의 세계 배급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같은 원대한 구상 아래서도 채대표가 가장 소중히 꿈꾸는 게 있다. 새롭고 젊은 영화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영화 커뮤니티(공동체) 조성이다. 이달 인사동에 개관한 미로스페이스가 그 시발점이다. 영화 상영과 감상, 대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꾸미겠다고 했다. 기존의 예술영화 전문 상영관과 차별화한 극장이라는 것이다.

"메이저 영화사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희망입니다. 돈만 생각했다면 진작 쓰러졌을 거예요. 젊고 새로운 감독과 영화, 그것의 발굴과 국내외 소개라는 초발심과 영원히 함께 할 겁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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