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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번째 제헌절 아침에] 人治 넘어 法治로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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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매년 맞는 제헌절이지만 올해 54회 제헌절의 감회는 너무나 착잡하다. 우리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선생이 1954년 제헌절 6주년을 맞아 '제헌절 유감'이라는 시론에서 "첫술에 배부른 법은 없다. 우리는 초등학교 6년생의 우리 헌정을 가지고 쓸데없이 비관할 필요는 없고 희망과 열성을 가지고 우리의 헌정을 기르자"고 심경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오늘날 선생이 다시 시론을 쓴다면 뭐라 했을까 궁금하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이를 위해 권력분립을 규정한 국가기본법이다. 헌법에는 우리나라가 지향하는 이상과 목표가 담겨 있으며 국가의 조직·기구·기능의 메커니즘이 규정돼 있다. 말하자면 모든 국정운영은 헌법의 정신과 내용을 실현하는 과정이며 입법·사법·행정은 그 구체적 예다. 그리고 헌법은 우리 국민의 총의를 반영한 것이므로 헌법은 가장 명시적이고 집약적으로 표시된 국민의 의사인 것이다.

法보다 연줄이 앞선 사회 유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법은 국가경영자들이나 국민으로부터 존중받기는커녕 등한시되거나 무시되고 때로는 유린돼 왔다. 헌정 초기에는 남북 분단을 이유로 한 안보논리에, 개발연대에는 경제논리에 헌법의 정신과 규정된 내용 등은 무시되고 압도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장기간의 독재통치하 국정운영 과정에서 법치(法治)보다 인치(人治)가 앞섰기 때문에 갖가지 반 법치주의적 행태가 만연됐고, 그로부터 파생된 각종 적폐와 인치문화가 부지불식간에 곳곳에 배어 있다.

사실 우리 사회가 법치사회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받아온 정신적 고통과 유무형의 피해는 엄청나다. 개개 국민의 기본적 인권침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인치로 인한 신분상의 불안 때문에 많은 공직자가 직무에 대한 주인의식을 잃음으로써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돼 국가경영의 효율성과 생산성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인치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공권력 남용이나 사유화 현상은 관계공무원들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국민으로 하여금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로 접근하도록 유도해 결국 비리와 부정부패를 양산하는 원천이 됐다. 헌법이나 법률 규정보다도 힘있는 인맥 중시 풍조가 짙어지게 된 것도 그 결과다.

이러한 상황의 우리에게 개혁은 역사적 소명이요, 과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위 개혁세력에 의해 추진돼온 개혁드라이브는 아직도 인치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때로는 반 법치적 절차와 방법으로 추진되기도 해 또 다른 개혁대상을 양산하고 있다.

수십년 동안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해 투쟁해온 민주세력들이 집권하여 국가를 경영하고 있는데 그들마저 반 법치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난받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리 모두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국력 수준에 걸맞지 않은 반 법치적 행태가 아직도 이 땅에서 횡행하고 있는 데 대해 모두가 연대책임을 통감하고 법치사회의 토착화를 위해 분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국민의 공동체 의식이 무엇인가를 우리 헌법에서 찾아야 한다.

이 나라 국민된 자는 최소한 이러한 공동체 의식 아래 각자의 공사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이고,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저버리거나 공동체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어떠한 명분과 목적을 내세우더라도 국민에게 피해를 끼치는 존재이므로 마땅히 규탄 대상이 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의 정치·사회 현실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여야 정치세력을 비롯한 위정자들과 모든 공직자들은 국정을 처리함에 있어 법치원리를 떠나서는 자신의 공적 지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항시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헌법의 이상과 목표를 추구하는 국가적 과업의 일부를 담당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투표장에 다녀오는 것에 그친다면 그들의 자유는 투표의 순간뿐이요, 투표가 끝나면 그들은 도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라는 고전적인 비판도 있다.

헌법은 우리를 지키는 보호막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지도층이나 지식인들은 국정운영에 관한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려 하지 않고, 소아적인 타산 때문에 몸을 사리느라 '침묵하는 다수'로 남으려 한다.

반면 소외계층과 노조는 그동안 당해온 한풀이나 하는 양 불법적인 집단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독재자의 반 법치적 행태가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소외계층이나 노조의 한풀이식 반 법치적 행동도 이제는 역시 용납될 수 없다. 반 법치적 행태를 외면하거나 침묵을 지키려는 다수의 태도나 위법인 줄 알면서도 불법 투쟁을 고집하는 노조의 태도는 결국 이 땅에 반 법치적 행태를 확산시키는 촉매로 작용해 머지않아 부메랑처럼 자기 손해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헌법을 존중하고 법률의 지배를 실현하려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다. 우리가 헌법을 존중하고 법치를 사랑하면 헌법은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줄 것이지만, 헌법을 소홀히 하고 법치를 멀리하면 헌법은 우리를 보호막 밖으로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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